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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사태 막바지 '퇴진 말고 길 없다'

노조 ´YS 충성편지´폭로···박지원장관 권사장 면담요청 거절

김 현  2000.11.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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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의 권호경 사장이 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면서 노조의 권 사장 퇴진운동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문민정부와 호흡을 같이´ 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개편하고 인사 이동을 했다는 내용의 이 편지가 공개되자 간부들이 권 사장에게 입장 표명을 직접 요구하고 나서는가 하면 사회단체·정부 유관 부서에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나섰다.



정치권에 대한 권 사장의 행보에 대내외의 관심이 처음 모아진 것은 지난 1월 24일. 민주당 사무실에 ´축 총선승리´라는 글귀를 적어 창당 축하 화분을 보내면서였다. 권 사장은 ´김옥두 총장과의 옛 정이 앞서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밝혔고 간부들은 ´목회자 출신의 사장이니만큼 언론계 풍토를 잘 몰라서 그런 걸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이후 노조의 폭로로 드러난 권 사장의 정치적인 행동은 ´흐려진 판단력´이나 ´목회자 사장´을 이유로 그냥 넘어가기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먼저 재임 직후인 94년 4월부터 98년 2월까지 정치인 14명에게 1200여만 원을 제공해온 후원금이 그렇다. 보도국 기자들은 "재야 시절의 친분관계는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렇게 연관짓기에는 힘든 몇몇 정치인들의 이름에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은 노조의 또다른 폭로로 밝혀진 매월 판공·활동비 1800만원의 내역도 이같은 맥락에서 짐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노조의 폭로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작년 파업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고 노조의 싸움 자체가 워낙 비밀리에 진행된 것도 한 이유였다.



그러던 중에 이른바 ´노조 파괴공작 문건´이 공개됐다. 작년 파업 때 노조 집행부와 조합원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지연·학연 등의 계파를 분류해 ´전의를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이 드러난 것. 기자들은 처음으로 성명을 냈다. 기자협회 지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작성자와 지시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어 아들 결혼식 청첩장 명단과 기조실 평직원이 매긴 인사평정 문건이 공개됐다.



지켜보던 직원들은 급기야 화분 사건으로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라는 희대의 소송을 냈다. 노조 집행부를 맡았던 많은 간부들도 노조의 퇴진운동에 심정적인 동요를 보였다. ´언제 물러날까´를 내기하는 간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YS충성편지´가 밝혀지면서 이같은 간부들의 심정적인 동요도 가시화하고 있다.



취임 6개월째인 94년 8월 17일 작성한 이 서신에서 권 사장은 ´…매양 정부시책을 비판하면서 편견에 치우쳤던 프로그램들을 대폭 정비하고 30년 동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온 CBS 논평 프로인 세상만사, 월요특집, CBS칼럼 등은 작가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힘들다고 보아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했으며, 인사 이동을 통해 문민정부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진용으로 개편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사회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정부시책과 동일한 노선을 추구한다는 시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마는, 이 길만이 CBS가 교회와 국민에게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노조(위원장 민경중)는 A4 용지 2장 반 분량의 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노조가 총선승리 화분이나 정치후원금 지원 등의 사건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보지 않고 권 사장의 정치권 줄대기라고 주장해온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민 위원장은 "저항정신으로 일궈 온 CBS의 전통이 권 사장 퇴진의 첫 번째 이유"라면서 "이제 퇴진운동의 결말을 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권 사장은 2일 오전 국장급 이상 간부와 각 지역 본부장 14명이 모인 긴급 고위간부회의를 열어 직접 해명하는 자리에서 "이 편지는 내가 쓰라고 지시한 적도 없고 본 적조차 없다"고 말했다. 권 사장은 이 자리에서 "편지가 비서의 컴퓨터 안에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며 작성자를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 사장은 "이 편지 말고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보낸 또다른 편지가 있으며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고 말해 이번 편지의 발송 여부를 떠나 권호경 사장의 언론관에 대한 간부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한 간부는 권 사장이 주재한 이 자리에서 "CBS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고 개탄하며 "화분 사건이나 편지 파동이 모두 사장의 언론관이 잘못돼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직접적인 비판까지 했다. 편성국의 한 PD는 "그동안 노조의 싸움을 ´지겹다´라고 바라봤을 간부들조차 이제는 권 사장에게서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권 사장은 이 날 회의에서 간부들이 사장의 거취문제와 관련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자리를 비켜달라´고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내내자리를지키면서 "나는 한국 교회가 임명한 사람"이라는 종전의 입장을 다시 밝혀 노조의 퇴진 압력에 강하게 맞섰다. 또 지난 2월 24일 방송법 시행령 공청회장에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왔을 때에도 권 사장은 회사 간부를 보내 면담을 요청하는 등 여전히 ´권력층에 기댄´ 사장직 유임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날 박 장관은 권 사장의 면담 요청에 대해 ´만날 이유 없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충성 편지´가 공개되면서 이른바 ´DJ 서신´에 대한 얘기까지 돌자 청와대 공보실에서 노조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등 각계에 파문이 미치고 있다.



노조는 작년에 권 사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서신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권 사장은 "노조가 이미 갖고 있을 테니 먼저 공개하기 전에는 밝히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CBS 재단이사회의 표용은 이사장은 최근 노조와 만난 자리에서 ´권 사장이 직접 나가지 않는 한 나가달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이면서 그러나 "상황이 이 정도까지 왔으면 자신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텐데 운동하던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경중 노조위원장은 "3월 16일께 열리는 재단 이사회에서 결정되겠지만 그 전에 사장 퇴진운동의 결론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민 위원장은 "그러나 CBS의 저항정신을 되살려 이번 퇴진 운동의 마지막 결단은 CBS의 간부 선배들이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총선 승리´에서 불거져 ´충성 편지´로까지 이어진 권 사장 퇴진운동은 권 사장 개인에게는 ´목회자 사장´이 아닌 ´정치 사장´이라는 개인적인 오명을 남기겠지만 결국에는 CBS 저항정신의 승리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CBS 안팎의 지배적인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