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괴로움과 어려움이 많았어도 흘러간 시절은 언제나 그리움과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국정홍보처가 발행한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제7권)(1967-1968)을 펼치자 나의 가슴은 36년전으로 달려갔다. 1967년은 국인들이 국민이 세운 장면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고 집권한지 6년째 되는 해로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일주일에 2~3건씩 거리에서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신문에 실릴 정도로 나라와 국민 모두가 여전히 가난했던 시기였다.
이해는 H?뤼브케 서독대통령, H?험프리 미국부통령, 타놈 키티카쵸른 태국총리, 해롤드 홀트 총리 등 우방국의 정상들이 잇달아 방한, 기자들을 바쁘게 했다. 또 이해 5월 3일 대통령선거에서는 박대통령이 4년전 15만표로 간신히 신승(辛勝)한 것과는 달리 경제개발추진 등의 공로로(?)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재선됐다.
1967년은 특히 월남에 이동외과병원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백마부대 등 미국에 이어 제2의 전투병을 파병한 후 한국군이 월맹군 및 베트콩들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고 건설과 대민 지원활동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한 해였다. 때문에 전투와 건설 등 월남에 관한 뉴스는 언론의 고정 메뉴로 연일 크게 보도되었다.
언론계로서 기록할 만한 일은 이해에 창립3주년을 맞은 한국기자협회가 제1회 기자상을 시상한 일이다. 현 프레스센터자리에 있던 옛 신문회관 3층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이춘성 문공차관과 단상의 고 최석채 선생, 김종규 전 서울신문사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1968년은 벽두부터 엄청난 사건으로 국민을 놀라게 했고 한국은 또 한차례 세계의 시선을 모았다. 1월 21일에는 북한의 124군부대 특공대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다가 거의 사살되고 1명은 도주했다. 유일하게 체포된 김신조가 “우리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TV를 통해 얘기했을 때 국민들은 북한의 무모함, 악랄함에 저마다 경악했다.
그뿐인가. 이틀 뒤 원산 앞 공해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됐을 때 미국의 보복론으로 한국전에 이어 또다시 이 땅이 불바다가 되는 것 아닌가하며 온 국민은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당시 신문사입사 5년째로 생후 처음으로 인도취재를 앞두고 들떠있던 필자는 두 사건으로 계획이 백지화된 것은 물론 후속기사 취재로 1년 내내 뛰어다녀야만했던 해였다.
필자로서 이해에 기억에 남는 일은 에디오피아의 하일레?셀라시에 황제의 방한이었다.(5월 18~21일) 과거 1930년대 무솔리니의 군대가 침공했을 때 제네브의 국제연맹으로 달려가 원조를 호소해서 유명한 전설적인 아프리카 최후의 황제인 우그는 6?25때 직접 한국을 도우려 파병을 결정한 바 있어 우리에게는 은인이었다.
필자는 그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컬러 특집에서 “고대 악튬제국의 후예로서 고고한 품위를 지닌 노 황제…”라고 썼고 방한 내내 수행 취재했다.
특히 일요일인 20일 경춘가도를 달려 춘천 호반에서 “이디오피아 참전비”를 제막하고 귀로에 의암호에서 점심을 드는 도중 배위에서 연주하는 우리의 국악을 들으면서 “경춘가도의 코스모스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이해는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4월 27일)과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5월 4일)이 세워지고 최초로 서울 서소문에 미니 수퍼마켓이 개장됐으며(6월 1일) 주민등록증이 발급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