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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린다 김 로비의혹 사건

´보안이 생명´ 한달 간 올빼미 작업, 당시 기사와 편지 비교...자료 진위여부 점검

채병건  2000.11.16 11: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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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중아일보 사회부 기자





누런 대봉투에 담겨있는 한묶음의 서류를 펼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당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그동안 국방부 내에서 소문으로만 돌던 안주거리 이야기들이 팩트로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두 시간 넘게 앉아있던 자리를 뜬 뒤 서울지검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손은 운전대에 있었지만 눈은 멍했다. 생각은 이미 만나야 할 사람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날 오후 곧바로 팀이 구성됐고, 조심스런 취재가 시작됐다. 취재는 주로 밤에 이뤄졌다. 지난달 내내 저녁에 대법원 기자실로 중앙일보 법조팀 멤버들이 하나씩 하나씩 모였다.

보안이 생명이었다. 대법원 기자실이 잠겼을 땐 지검 기자실에서 ‘허준’이 끝나는 오후 11시 타사 기자들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며 가방 속의 봉투를 꺼내야 했다. 자료의 진위(眞僞)가 취재의 출발점이었다. 편지 분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팀원들은 편지의 구절구절들을 당시 시점에서의 기사 스크랩과 비교해 보며 ‘위조’부터 꼼꼼히 점검해 갔다. 놀라울 정도로 글귀 하나하나가 당시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 다음은 사람이었다. 역시 팀장의 지시로 자료에 나와있던 인물들이 팀원들에게 할당됐다. 그 사이 어느 선배는 린다 김의 주소지를 용케 찾아 왔고, 어느 후배는 역시 해가 떨어지면 사람이 없는 법원 기자실에서 편지들을 정성스럽게 컴퓨터로 옮겼다.

철저하게 시점과 상황을 익히고 나간 팀원들에게 취재원들은 잡아 뗄 수 없었다. 완전무장한 기습적인 취재에 놀랄 만한 진술들이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의 명단이 취재수첩에 계속 쌓여 갔고,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큰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료를 접할 때부터 직감했던 ‘과연 기사를 써야 하는가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였다. 대한민국에서 스캔들은 ‘정론지’들이 다루는 소재가 아니었다. 사인간의 애증(愛憎)을 담은 편지는 자칫 주간지의 기사거리였다. 취재와 병행해 토론이 계속됐다. 왜 기사를 써야 하는가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그 사이 의견은 정리됐고 팀장은 단순명료하게 결론을 요약했다. “직무와 관련이 있는 인물과 사안에 대해 상식적으로 충분한 공무(公務)상의 의혹이 있는 경우”까지 실명 기사화한다는 것이었다.

반론권은핵심이었다. 팀장은 린다 김의 변호사까지 만났다. 린다 김측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기 위해 직접 대면은 물론 서면질의서까지 준비, 변호사를 통해 ‘공증’된 답변까지 받았다. 물론 린다 김의 반론은 다시 한차례 김씨측 변호사의 검토를 거쳐 팩스로 회사에 전달된 뒤 지면으로 옮겨졌다. 실명으로 옮겨지지 않은 다른 관계자들, 기사에선 한줄로 언급됐던 인물들도 최소 두차례 이상 당사자 접촉을 통해서 입장을 전달받았다.

그러는 사이 D-day는 다가왔다. 드디어 전날 시내판 기사는 출고됐고, 시커멓게 나오는 1면 제목에 기자로서의 성취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다가왔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달여간의 올빼미식 작업에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에는 상황의 추이와 대응방안에 대한 전술이 떠나지 않았다.

끝으로 가장 중요하게는 이번 취재의 마지막 단계에 우연찮게 서있었던 개인적인 행운을 반드시 지적하고 싶다. 중앙일보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게 이뤄졌던 아름다운 취재 모습에 공을 돌리며 그분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