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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무력함. 사죄의 마음만 남아

당시 취재기자가 증언한 저항과 한계

편집국  2000.11.16 12: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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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토론회에서는 80년 광주 현장을 취재했던 두 기자가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토로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오효진 당시 MBC 기자(현 자민련 지구당 위원장)와 박화강 당시 전남매일 기자(현 한겨레 광주지사 부국장)는 취재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기자로서 한계와 저항의 기억을 다시 전했다. 두 참석자의 발언을 요약 정리한다.



"그날 나는 계엄군 옆에 있었다" 오효진





80년 5월 20일 처음 광주에 내려갔다. 한번은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광주역으로 갔다. 여기저기 많은 시체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역장실의 철도전화는 교통부로 연결돼 있었다. 기자실 여직원을 통해 본사로 연결, 20분 간 기사를 불렀고 자연스레 귀담아 듣고 있던 기자실의 다른 기자들에게 내용이 공개됐다. 나중에 이것이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속의 빌미가 됐다. 당시 방송사의 경우 일반기사는 전용선을 통해 송고했다. 이미 불타버린 광주MBC에 가보니 벽 틈으로 전용선 두 줄이 흘러나와 있었다. 이를 자석식 전화로 연결해 10분 간 기사를 송고했다. 당시 내 기사를 듣고 있던 본사 사원들이 모두 울고 있었다고 한다. 국내 기자는 시민군에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한 관계자를 만나 ´제대로 안 나간다는 거 안다. 하지만 기록이라도 남기자´고 간절히 설득해 같이 어울릴 수 있었다. 시민군으로 합류한 학생, 시민들은 ´형님, 쉬면서 하십쇼´, ´지금 나가면 위험하니 이따 나가요´ 하며 나를 챙겨줬다. 그러나 20일 도청이 접수되자, 어제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던 나는 계엄군 옆에서 그들이 굴비처럼 엮여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5년 후 그들 중 한 명을 다시 만났고 그는 ´잡혀갈 때 보니까 당신은 군인 옆에 있더라´고 말했다.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기자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 이후 사표를 냈다.



"지금 우리는, 싸울 수 있는가" 박화강





그날 이후 늘상 사죄하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전남매일 기자들은 80년 5월 20일 검열을 거부하고, 눈으로 보고 확인한 그대로 신문을 제작키로 결의했다. 최초 발포, 공수부대 잔학상, 시민들의 저항이 그 신문에 다 있었다. 그러나 두 장 정도 떴을 때 간부들이 달려와 활판을 헐어버렸고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결의했다. 진실을 전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더 이상 기자가 아니라는 결의문을 작성했다. 화순까지 숨어 들어가 2만장을인쇄, 금남로에 뿌렸다. 다시 몇 사람이 모여 지하신문을 만들자고 결의했고 준비작업에 들어갔으나 시민들이 총을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이상 희생은 안된다고 판단해 활동을 접었다. 최소한 그 정도의 저항은 있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쓰고 싶고, 아무리 활자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기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힘없는 신문사라도 이렇게 활판을 엎어버리고 나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사 80년 당시의 그런 통제는 다시없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나 왜곡보도 요구가 온다면 지금은 기자의 비판정신에 기대서 그런 왜곡보도를 막을 수 있겠는가. 모든 신문이나 방송이 자사이해에 빠져 기자들이 희생되고 기자정신이 훼손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그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비판정신을 잃지 않고 연대의 틀을 만들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