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저녁, 대전중앙병원 응급실. 20여 명의 동료들 심정은 망연자실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들리는 건 한숨소리와 낮은 흐느낌뿐이었다.
홍 기자가 응급실로 후송됐을 때도 동료들은 밀려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면서 시합에 참가했고 어느 팀보다 열심히 선수들을 응원했다. 그러나 경기를 마치고 서둘러 병원에 달려갔을 때에도 홍 기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밤 9시 30분 경 병원으로 달려온 가족들의 오열을 동료들은 그저 침묵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이두헌 전남매일 지회장은 “이번 축구대회 연습에 누구보다 열심히 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전국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며 그렇게 좋아하더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묵묵히 병원 한 켠을 지키고 있던 오성수 경제팀 기자는 “버스를 타고 대전에 오면서도 내내 옆자리에 앉아 ‘능력을 인정받는 기자가 되라’고 충고해 준 선배”라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올라올 때까지 응급실 앞을 떠나지 못하던 20여 명의 동료들은 “모든 일에 의욕이 넘치고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능력을 인정받던 기자였다”며 “홍 팀장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줄곧 자리를 지켜온 기자협회 임원진은 물론 시합을 마치고 모여든 강원도민일보, 경남신문, 국제신문, 중부일보 관계자들도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 기자들은 “격무와 과로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칠 줄 몰랐다”면서 곧바로 상금을 조의금으로 전달했다.
홍 기자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뿐더러 전남대병원의 간호사로 있는 부인의 내조로 꾸준히 운동을 하며 자기관리를 해오다 갑작스런 변을 당해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묵묵히 격무를 감내하다가 당한 사고라는 것이다. 실제로 홍 기자의 부인 김정희 씨는 “평소 ‘컴퓨터 한번 쓰고 나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고 말했고, 밤 11시에 들어와 새벽 2시까지 기사 준비하고는 다시 6시에 출근하는 일과가 반복됐다”고 말했다. 홍 기자의 한 교회 후배는 “우리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최근에 스트레스로 목 언저리와 어깨가 자주 뭉쳐 침술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홍 기자의 부음을 접한 이 지역의 한 기자는 “IMF 이전으로 인원이 원상 회복된 서울 지역과 달리 대부분의 지방 언론사는 IMF 이후 줄어든 인력으로 늘어난 지면을 채우고 있다”면서 “기자들의 업무부담은 정말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고 홍창표 기자는 62년 전남 무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89년 전남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전남매일에 입사했다. 이후 지방부, 사회부, 정치부 등을 거쳤으며 정치부 차장, 취재1팀(정치경제)장 등을 역임했다. 부인과 1남(초등학교 2학년)2녀(초등학교 5학년, 1학년)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