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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호 특집] 기자협회와 나

언론인 접촉보고·YS장학생 폭로 기억 남아

김주언  2000.11.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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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보도지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87년 풀려난 이후 기자협회보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섰다. 6.29선언 이후 한국일보를 필두로 언론사 노조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언론인 스스로의 힘이 아닌 시민의 힘으로 주어진 언론자유였지만 언론인들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언론상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당시 기자협회장이었던 이춘발 선배의 요청으로 88년 7월 1일자부터 8월 26일자까지 8회에 걸쳐 김일평이란 익명으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현주소’를 연재했다. 3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 언론사를 발판으로 정관계에 들어선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행적을 파헤친 연재물이었다. 정관계에 진출한 언론인들이 언론통제의 일선에서 활약했다는 비난이 언론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언론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필자가 누구냐는 문의가 빗발쳐 시리즈가 끝난 뒤 실명을 밝혔다.

이후 필자는 편집위원으로 위촉돼 기자협회보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88년 언론청문회 당시 ‘제2의 보도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 접촉보고서’를 입수해 전문을 기자협회보에 게재한 사실은 의미있는 일로 기억된다.



필자는 92년, 93년 두차례에 걸쳐 기자협회장을 지내면서 기자협회보를 명실공히 언론계의 영향력있는 언론비평 매체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기자협회보의 판형을 타블로이드에서 대판으로 확대하고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당시의 재정형편으로 보아 기자협회보를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광고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회장 시절 기자협회보를 제작하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건은 두가지 정도이다. 당시 문화방송의 원로 아나운서였던 정모씨의 비리를 파헤쳐 기자협회보에 실었다. 이 사건으로 정씨는 언론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93년에는 ‘언론계 YS장학생’ 실체를 밝혀내 언론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당시 연합통신의 편집간부였던 김모씨가 정치부장과 정치부 기자들의 동향을 파악해 당시 대통령후보였던 김영삼캠프 핵심간부에게 보고했던 원문을 입수해 기자협회보에 게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결국 김씨도 언론계를 떠났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두 선배 언론인에게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기자협회보는 그동안 언론운동 매체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 그동안 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기도 했고 언론계안팎의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자사이기주의가 판치는 현실 앞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겠지만 언론운동 매체로서 정론을 고집해주기를 기대한다.



김주언 32·33대 기자협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