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6월 ‘김정일 물러나야’ 사설과 평양방송의 ‘무자비한 보복타격’ 논평 이후 조선일보의 대북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또다시 불거져 나왔다. 발단은 지난달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가 거부되자 조선일보 기자들이 채택한 결의문을 북측이 거론한 데서 비롯됐다.
평양방송은 8일 논평에서 “남조선의 조선일보만이 구태의연하게 민족의 통일열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대결을 추구하고 있다”면서 “조선일보와 같은 것들은 마땅히 민족의 이름으로 천백번 길들이기를 똑똑히 하고 단호히 결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곧바로 11일자 사설을 통해 북측의 위협과 조선일보를 ‘반통일’로 매도하는 세력을 인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사설은 북에 대한 반박과 함께 상당부분 남측의 내부 비판에도 무게가 실려있다. “평양방송뿐 아니라 남쪽에서도 조선일보가 남북문제에 ‘걸림돌’이라고 주장하는 허황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북측의 논평이 조선일보를 지목한 만큼 당사자로서 입장을 밝힌다는 차원 이외에 변화의 기로에 서있는 시점에서 자기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이와 관련 방상훈 사장은 10일 운영회의에서 “우리의 통일노선이 무엇인지,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적극적으로 알려 국민들로 하여금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게 해야할 것”이라며 “무엇보다 조선일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 관계자 역시 “이번 사설은 북측 공세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방어”라며 “사실 정상회담 과정에서 조선일보 보도는 타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름대로 남북화해 분위기에 호응하는 논조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언론계를 비롯한 내부 비판 역시 계속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용진가’ 보도 사례에서 보듯 취재상의 실수가 조선일보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공간을 떠돌던 ‘암 발언’이 뒤늦게 드러나 조선일보 내부에 충격을 더했다. ‘오마이뉴스’ 게시판에서 결국 삭제되긴 했지만, 암투병 중인 조선일보 기자들에 대해 ‘조선 기자들의 암 발생 기쁜 소식, 하늘이 그런 나쁜 놈들을 그냥 넘어갈리 없다’ 운운한 글은 반조선일보 감정이 있어서는 안될 폭언으로 나타난 일이었다.조선일보노조(위원장 윤희영)는 14일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조선일보 비판과 비난에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겠지만 상식 이하의 위협과 폭력에는 결연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노조의 판단”이라고 밝혔다.
북의 위협과 언론계 내부의 비판, 사이버 공간의 언어폭력 등이 맞물려 결과적으로 통일관을 비롯한 조선일보의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공개할 필요성을 배가시킨 셈이다.
현재로선 북측의 또다른 논평이 없다면 조선일보와 ‘확전’ 여지는 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방 사장은 운영회의에서 “고칠 것은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는 자세로 위기를 헤쳐나가고, 결코 틈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고 평양방송은 13일 ‘통일을 위해 협소한 이해관계와 편견에서 벗어나 민족 대단결을 이루자’는 요지의 논평을 냈다. 북-조선일보 양자가 어떤 변화의지를 보일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