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훈 연합뉴스 남북관계부 기자
정상회담으로 만들어진 화해와 협력의 급물살 속에 남북의 이산가족 200명이 오는 15일 서울과 평양에서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만난다. 헤어짐의 시간이 길었기에 그들의 만남은 더 크고 의미가 깊어 언론의 구미를 당긴다.
85년 이후 15년 만의 만남을 취재해야 하는 과제를 앞에 두고 기자는 15년 전의 빛바랜 신문 스크랩을 꺼내들었다.
만남, 눈물, 흥분, 다양한 사연, 그리고 또 한번의 헤어짐.
이산가족의 만남은 그 이산의 사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기고 85년 가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지나갔다.
85년 이산가족 만남의 최대 화제는 지학순 주교.
지 주교는 당시 평양에서 여동생 용화 씨와 매부, 조카 등과 상봉을 할 수 있었고 유신반대 운동 등으로 잘 알려진 덕택에 지 주교 가족의 상봉은 언론의 관심사가 됐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 가겠다더니 돌아오셨구만요”라는 당시 용화 씨의 발언은 각 언론사에 대서특필됐다.
이 언급 이후 각 언론사는 북한의 종교 실태, 북한 주민의 생활상 등을 앞다퉈 다루면서 남북간 사회적 이질성과 북한체제의 저급성을 들춰내 알리는데 분주하게 움직였다. ‘통제된 체제’ ‘종교마저 발 붙이지 못하는 체제’ ‘획일화된 체제’ 등 갖가지 수식어가 뒤따랐다.
지 주교의 상봉 이외에도 다른 모든 상봉보도가 남한 체제의 우월성과 열악한 북한 사회상의 편린들만을 찾아내는데 주력했다.
빛바랜 스크랩 속에서 읽은 그날의 보도는 과연 오늘 우리의 보도 행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케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당시의 보도가 북한 사회를 잘못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북한 주민은 사회주의라는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종교가 없고 잘 통제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배 언론인들을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이산가족 상봉 보도는 그때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북은 정상회담을 통해 더 이상의 체제 우열 가리기는 무의미함을 공통으로 인식했다. 서로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공생과 공존의 길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공동선언에서 남북이 양측 통일방안의 유사성을 찾아내 공통의 지향점을 마련한 것도 이러한 인식기반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분명히 북한은 남한과 다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시스템이 상이하고 더이상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그럼 50년 만에 만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쓸 것인가.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은 50년 간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고 따라서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만남은 남북의 화해와 과거 분단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글쓰기도 화해에 초점이 두어져야 한다. 상생의 장을 대립의 장으로 바꾸는 장본인이 우리 언론이 돼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에는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남한 언론들이 한바탕 전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하지만 취재경쟁을 하면서도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기사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민족의 반목과 대립을 부수는 화해의 글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