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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뒤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기자협회 36주년 이야기

80년 제작거부 결의 ´번안동의´로 관철, 유신정권 '협회보 월간으로' 요구에, '차라리 협회 해체'로 맞서

김상철  2000.11.17 2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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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가 창립 36주년을 맞기까지 그 활동의 뒤편에 자리잡았던 숨겨진 얘기들도 적지 않았다. 남북 언론교류를 재추진하고 언론발전위원회 구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재정안정을 위해 자체 기금을 조성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대부분 ‘엄혹한 시절’의 찬바람이 느껴지는 사연들이었다. 협회 관계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 몇 가지 뒷얘기들을 모아봤다.



‘공 차며 울분 토하자’축구대회 시발점

기자협회의 대표적인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일선기자 친선 축구대회는 72년부터 열렸다. 서울지역에서 먼저 ‘기협 분회대항 축구대회’로 시작된 행사 취지는 회원들의 체력 향상과 친선 강화였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한 ‘분풀이’, ‘속풀이’의 성격도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과 국민들의 언론성토 수위가 높아지던 71년 5월 기자협회는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을 채택했다. ▷진실보도 ▷불법적인 기자연행 거부 ▷정보기관원의 언론사 상주·출입 반대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박 정권의 언론탄압은 계속됐고 결국 손주환 8대 회장이 임기만료 전에 돌연 사표를 제출하는 등 기자협회는 조직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렇게 한 차례 싸움이 탄압으로 끝나고 다음해 김상진 9대 회장이 취임하면서 축구대회는 시작됐다. 한 언론인은 “내부 화합과 함께 ‘자유롭게 취재·보도하지 못하는 울분을 공이라도 차면서 풀어보자’는 기자들의 속내가 담겨있었다”고 설명했다.

참고로 첫 대회를 참관한 장덕진 당시 축구협회장은 축사를 통해 “이번 대회에서 우수 선수 2명을 뽑아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하겠다”는 공약(空約)을 내걸기도 했다.



“국제여론 안좋아진다”문공부에 경고

기자협회 창립 3개월 후인 64년 11월 월간 4면 체제로 창간한 기자협회보는 68년 8월 지령 40호부터 주간 발행을 시작했다. 당시 ‘신문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은 윤전기 1대 이상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수 인쇄시설을 갖춰야만 주간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 조항을 언론통제 장치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협회보의 주간 발행은 그 자체로 정부 통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유신체제로 접어들자 기자협회에 대한 탄압은 먼저 기자협회보 발행을 월간으로 환원하라는 문화공보부 지시에서 시작됐다. 73년7월이었다.기자협회보는 월간으로 후퇴했고 문공부가 주간 발행을 허용한 것은 다음해인 74년 2월이었다. 이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박기병 10대 회장과 정부측의 담판이 있었다.

기자협회보가 월간으로 발행되자 박 회장은 문공부를 찾아가 결단을 촉구했다. “정부의 이같은 조치는 기자협회를 필요 없는 조직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다. 정 그렇다면 기자협회를 해체하겠다.” 박 회장은 실제로 협회 해체를 위한 전국 대의원대회 소집 방침을 밝혔고 ‘그럴 경우 국제여론이 안 좋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정부는 협회보 주간 발행과 협회 활동 보장이라는 요구사안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듬해 3월 이른바 동아·조선투위 사건 이후 협회보는 첫 폐간 조치를 맞게 된다.



제작 전면거부안 번안동의로 가결

80년 5월 들어 기자들의 저항은 검열철폐 결의로 모아졌다. 5월 16일 기자협회는 회장단, 운영위원, 분회장, 보도자유분과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격론 끝에 20일부터 검열을 전면 거부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작을 전면 거부하자는 입장과 계엄사령관에 시정을 요구하면서 사태를 풀어가자는 입장이 엇갈렸던 것이다. ‘현장을 떠난 투쟁은 실효가 없다’는 신중론이 세를 얻었고 표결 결과 제작 전면거부안은 부결돼 버렸다. 정남기 합동통신 기자(현 연합뉴스 민족뉴스취재본부장)가 ‘번안동의’를 제기한 건 그 때였다. 번안동의는 의제가 너무 급하게 처리됐거나 절차상 소홀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될 때 그 의제를 재고해 다시 한번 표결에 부치는 회의 절차였다.

재표결에 앞서 다시 자체 토론이 시작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강경파’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갔다. 4시간 여에 걸친 논란 끝에 제작 전면거부 안은 가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켰고 기자협회 집행부 강제연행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남북 기자 체육대회등 교류 추진

기자협회의 남북기자교류 사업은 90년 기자협회 남북기자교류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구체화됐다. ▷남북 언론인협의회 구성 ▷언론기관 및 단체 상호 시찰·견학 ▷남북기자 체육대회 등의 교류안이 이미 89년부터 논의됐다.

기자협회는 94년부터 교류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먼저 안재휘 34대 회장과 협회 관계자 10명은 94년 9월 통일원에 북한주민 접촉신청을 내10월승인을 받아냈다. 같은 해 11월 캐나다 국적을 가진 송광호 강원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의 방북계획을 알게 된 기자협회는 송 특파원을 대북 특사로 임명했다. 아울러 11월 송 기자의 방북 편에 보낼 대북교류 제의문과 남북기자교류 특위 명단, 협회 소개문 등을 전달했다. 송 기자는 12월 방북계획이 연기되자 이 자료들을 모스크바 주재 북 대사관에 전달했다.

이후 ‘교량역’은 송 기자가 소개한 독일의 최 모 교수가 맡게 됐다. 기자협회는 12월 독일 영주권자인 최 교수에게 조선기자동맹 현준극 위원장 앞으로 보낸 남북 기자교류 제의문, 상호비방 중지 촉구 성명, 기자협회보 관련 기사를 전달했다. 이 자료는 최 교수가 95년 1월 방북하면서 조선기자동맹 간부에게 보내졌다. 기자협회는 2월에도 최 교수에게 ‘기관지-간행물 교류를 시작하며’ 제하 공문과 함께 기자협회보 최근호와 축쇄판 등을 발송했다. 최 교수는 3월 방북길에 이 자료들을 최용삼 조선기자동맹 제1부위원장과 조평통 간부에게 전달했다. 이후에도 기자협회는 상호교류 논의를 위한 회담을 조선기자동맹측에 수차례에 걸쳐 제의했으나 성사에 이르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