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7시 40분 경 세종문화회관 레스토랑에서 이운영 전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장이 이른바 ‘양심선언’을 하고 있었다.
이씨가 ‘선별 연락’한 언론사는 경향, 동아, 조선, 중앙, 한겨레와 KBS, MBC, SBS, YTN 등 모두 9개 사. 이들 20여 명 기자들의 취재수첩에는 ‘현직 장관’으로만 거론되던 박지원 전 공보수석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갔다.
20분 남짓한 ‘낭독’이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물리치며 이씨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기자들은 곧바로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길 건너 광화문 지하도에는 1일자 초판이 깔린 뒤였고 방송도 뉴스시간을 맞추기에는 역부족인 시간이었다.
동아일보는 초판 사설 ‘청와대 고위인사 누구인가’를 시내판부터 ‘박지원씨 전화 진실 가려야’ 라는 제목으로 바꿨다. 조선·중앙·한겨레는 1면에 ‘박지원 전수석 압력 전화’를 기사화 했다. 경향신문은 사회면 기사에서 박 장관의 이름을 ‘청와대 고위층’으로 뭉뚱그렸다.
이씨가 ‘양심 선언’하던 그 시각, 박지원 장관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있었다. UN 밀레니엄 정상회의 취재차 출국하는 기자들과 안부인사를 겸한 저녁식사였다.
오래 전부터 약속된 자리였지만 공교롭게 시간이 겹쳤고 실제 이 자리에서 오간 얘기도 이씨의 폭로에 대한 질문과 박 장관의 답변이었다. 2시간 여 동안 계속된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해명했다는 것 자체가 비보도”임을 전제하면서 입장을 밝히고 “내 이름을 밝히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30여분 동안 자체 논의를 거쳐 박 장관의 비보도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미 판갈이 된 시내판 신문이 그대로 배포되고 동아와 중앙은 박 장관의 부인 사실까지 기사화하면서 ‘비보도’ 약속은 자연스레 깨졌다. 박 장관도 언론의 전면에 나섰다. 언론은 31일 박 장관의 청와대 기자 면담 내용을 1일자로 바꿔 공식입장으로 다뤘다. 조선·동아·대한매일을 제외한 2일자 모든 신문이 사설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모두들’ 알면서 ‘누구도’ 정식으로 보도하지 못하던 현직 장관의 이름은 이렇게 공론화됐다. 사건 연루자의 검증되지 않은 ‘양심선언’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