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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음악 혁명가´ 서태지 유감

평론가들의 과대포장 확대 재생산 말기를

이주엽  2000.11.19 18: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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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엽 한국일보 편집부 기자





서태지가 돌아왔다고 난리다. 매체마다 온통 찬가 일색이다. ‘음악 혁명가’ ‘천재’라는 수사가 때를 만난 듯 어지럽다. 그런데 내 마음은 편치 못하다.

4년전 그의 비장한 은퇴식을 떠올린다. 그때 “거 참, 이벤트성 인생이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냥 좀 쉬겠다고 하면 될 걸, 굳이 자기 인생의 여지를 일거에 없애버리는 선언은 무슨 용기란 말인가. 그런데 다시 복귀한다? 내 심보가 고약해졌다.

누가 떠밀어서 한 은퇴도 아닐텐데 몇 년도 안돼 번복이라니. 공식은퇴 했으니 깨끗하게 공식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 “팬들 여러분 보고 싶었어요”라며 대충 얼버무린 복귀 메시지를 접하곤 ‘국민이 원해서’라는 정치인의 구태가 오버랩 됐다. 그가 경멸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위선과 불순이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얼마나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다.

서태지는 이 시대 권력의 다른 얼굴이다. 권력은 강력해 그를 비판하면 즉시 보복을 당한다. 얼마전 후배기자가 그런 경험을 했다. 전화로 인터넷으로 극성팬들의 항의와 비난이 빗발친다. 험담과 폭언은 웬만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다.

이런 팬들과 서태지는 무관하다 말할 수 없다. 사실상 내통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등 각종 발언을 통해, 음악을 통해 지속적으로 간접메시지를 보낸다. “내 멋대로 산다. 너도 네 멋대로 살아라. 반대의 뜻을 가진 사람과 타협할 필요 없다” “은퇴선언은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과하고 싶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사과한다”고 한 것도 또래들을 그루핑하는 의식화된 메시지다.

10대들은 서태지에 충성하고 서태지는 애정의 형식을 빌어 그에 보답한다. 폐쇄성은 열린 사회의 일차 적이다. 그룹안에 자신들을 가두고,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고, 나아가 다수의 세를 업으면 뭔가 통한다는 힘의 유혹에 빠진 것은 아닌지 자성해볼 일이다. 힘과 권력은 음악 반대편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서태지 음악. 인플레 혐의가 짙다. 그 배후로 90년대의 과시적 성향의 대중문화평론가들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소재사냥에 서태지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콩을 팥으로 만들 만한’ 그들의 언어적 과잉이 서태지를 실제 이상으로 확대 재생산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믿는다.언론도 그들의 이론적 선도에 편승했고, 거기에 서태지는 탁월한 매니지먼트로 적절한 텍스트로 호응했다. 시대가 연출한 대형기획이 된 셈이다. 저항의 낭만성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포즈일 땐 사치다. 서태지 음악의 저항성이란 것, 대체로 사치에 가깝다. 서태지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음악적 장치를 적절히 디자인 하는 능력일 뿐이다.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가는 소리들은 세련된 버라이어티쇼적 뮤지컬수준, 그 이상이 아니다.

서태지 음악은 ‘도구적 음악’일 뿐이다. 거품을 걷고, 천재음악가 라는 말은 다음의 누구를 위하여 아껴 두는 게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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