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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추·천·작] 고종석 장편소설 <기자들>

필부화된 쟁이들의 가슴을 친다

장재선  2000.11.19 1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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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문화일보 편집부 기자





기자들에게 <기자들>이란 제목의 책을 권하는 것은 민망하다. 뻔히 아는 동네사람들 이야기가 뭐가 대수롭겠냐는 지레짐작에 부딪쳐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93년에 나온 고종석의 소설 <기자들>은 그런 민망함을 무릅쓸 만한 값어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와 동시대에 기자 노릇으로 밥벌이와 보람을 삼는 30여개국 기자들의 면모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9개월 동안 진행된 ‘유럽의 기자들’이란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저자의 분신이랄 수 있는 주인공은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유럽의 도시 곳곳에 취재여행을 다니며, 기사를 썼던 과정을 생생하게 되돌려 보여준다.

그들의 재기 넘치는 대화 속엔 전환기의 세계문명에 대한 통찰이 각각의 색깔로 드러난다. 이 책의 저자가 근년에 에세이스트로서, 저널리스트로서 활발하게 내놓고 있는 저작물들은 그러한 통찰들을 자기 속에 받아들여 충실히 제 빛깔을 입힌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 저작물들이 우리의 전통과 사상엔 눈을 감고 있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세계시민이 되자’는 호소를 그처럼 풍성한 담론으로 뒷받침하는 예는 드물다.

이 책에 등장하는 기자들은 유럽의 한 복판에서 영어의 위력을 실감하며, 앞으로 세계의 계급이 이 언어의 사용자와 비사용자로 갈리게 되리라고 단언한다. 최근 우리나라에 몰아닥친 영어 공용화 논쟁을 냉철하게 예견한 셈이다.

이 소설엔 이렇듯 우리들, 그러니까 기자 생활 틈틈이 열심히 공부하겠다던 초년의 다짐이 어느새 암암해져버린 범백(凡百)한 ‘쟁이’들을 아프게 자극하는 대목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뜻밖에 잘 읽힌다. 그것은 주인공인 한국기자와 헝가리 출신 동료 사이에 피어난 사랑의 힘이 크다. 저자의 단편 <제망매>에서도 볼 수 있는 ‘연대감에 바탕한 연심(戀心)’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이것은 불륜을 페미니즘으로 위장하는 요즈막의 한국 연애소설에 지친 사람들을 다소나마 위로해줄 것이다.

눈밝은 이들의 예언대로 ‘문학이 미래 세계에서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것’임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인간정신을 담아내는 데 있어 아직 매력적인 장르다. 그것을 이 책이 새삼 깨닫게 한다.

(민음사 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