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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시·절] 인쇄소 파지 입수...부실기업 정리 특종 건져

재무부 출입하던 3년차 초년병 시절, 중견 선배들 틈새서 특종 노이로제

손광식  2000.11.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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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식 전 경향신문 주필·문화일보 사장





나는 당시 3년차의 기자 초년병이었다. 출입처는 재무부. 재무부하면 중견 선배들에게 배정되는 곳이라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던 시절이니 특혜조치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출입처에 암묵적으로 그런 등급이 매겨져 있었던 것은 정부기관으로서 중요도라는 명분론도 있었겠지만 진짜 기준은 ‘물 좋은 부서’라는 실속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선배들을 제쳐놓고 나를 재무부에 배치한 데스크의 뜻은 물론 촌지 많이 받아 술 잘 사고 밥 잘 사라는 뜻은 아닐 터인즉, 취재에 대한 강박관념이 대단했다.

당시만 해도 선배들의 기사취재 기득권은 대단했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거나 포커 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신문을 보면 대문짝만한 컷을 달고 톱기사가 터지곤 했다. ‘오늘 대가리 (톱기사) 없어’ 하는 데스크 전화만 받으면 잠깐 자리를 뜨는 것으로 재무부 기사를 만들어 내는 게 준(準)데스크 급 선배들의 취재역량이었다.

그러니 나는 번번이 당하면서 안팎으로 깨지기에 영일(寧日)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특종 노이로제라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몇 건의 작문기사로 지면을 때우긴 했지만 좀체 특종의 행운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감을 잡고 여기 저기를 쑤셔 본 바로는 부실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정부조치가 검토중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기자실에도 이 작업이 알려져 예의 작문성 기사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업 내용과 조치에 관한 핵심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청와대 비서실이 주관하고 있었던 터라 보안유지가 철저했었다.

때마침 기자단의 각 부처 대항 축구시합이 있어 기자실도 암묵적으로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는 ‘쓰지 않기로’ 엠바고가 걸려 있었다. 한번 터졌다 하면 출입기자들 각자에게 돌아오는 데미지가 큰데다가 ‘축구잔치’에 더 관심이 많으니 이 암묵적 엠바고는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라 할 만도 했다.

그래도 나는 ‘병아리 기자’라는 점을 면책특권으로 역이용해 기회만 엿보았다. 주필 S씨가 나를 은밀히 부른 것은 그 즈음이었다. 집안에 인쇄소를 경영하는 사람이 있는데 재무부 일거리를 좀 맡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출입기자가 청탁을 하면 일이 풀릴 것인즉 힘 좀써달라고 했다.

그래 세제국과 이재국의 담당자에게 부탁을 했다. 병아리라도 기자인지라 후환(?)을 염려해서인지 조금씩 일거리의 편의를 보아 준 모양이었다. 이 인쇄소 사장은 내가 무슨 빽이나 되는가 싶었던지 어려운 일만 있으면 SOS를 쳤다. 나도 S주필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무리가 없는 범위에서 도와주었다.

특종입수에 혈안이 되어있던 나는 혹시 이 인쇄소에 문제의 안건이 맡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쇄소 사장은 비밀리에 작업을 하나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재무부 직원이 입회하고 있어 빼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다만 인쇄과정에서 파지가 생기는 것은 참고로 보여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서 2∼3일 후 방대한 양의 인쇄물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가 파지를 핑계로 몰래 모아 온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짜 맞추기를 했다.

워낙 필화 사건이 많고 툭하면 정보부(현 국정원)에 끌려가던 시절이라 인쇄소 주인이 증거인멸을 당부했다. 나는 2차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혼의 아내 역시 기자출신이라 이 인쇄물이 지니는 폭발력을 감지했다. 나는 내용을 부르고 아내는 취재노트에 받아쓰기를 해 밤새워 수작업 복사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증거물을 불태웠다.

이리하여 천우사 대성목재 등 23개 부실기업을 대상으로 한 ‘반(反)사회기업인에 대한 조치’라는 경향신문의 특종보도가 다음날 1면을 도배질 했다. 32년 전 여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 기업 당 수억원 혹은 수십억원에 불과하던 부실금융이 이제는 수천억원에서 수십조원에 이르고 기업부실·금융난장은 30년 뒤인 오늘도 나라 경제를 흔들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엄청난 암시가 숨어있던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