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 견습기간이 끝나고 처음 나간 출입처는 한국은행이었다. 기자실은 발권부가 있던 별관 2층으로 기억한다. 워낙 보수적인 곳이 중앙은행이라 ‘불가근(不可近)’ 원칙에 따라 기자들의 방을 총재와 이사들이 있는 본관으로부터 멀리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있던 시절이다.
당시의 금융문제는 편타대출, 연불금융같은 것이 핫 이슈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기사는 국회에서 불거져 나오거나 재무부에서 터지는게 관례였다. 그러니까 한은을 출입하는 금융단 기자들은 문제가 터졌을 때 뒷설거지를 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생기면 으레 기자단의 간사가 ‘촌지’를 돌려주곤 했다.
내가 처음 받은 촌지는 D농산이 연불금융을 하고 준 2만원이었다. 기자실의 풍토도 관행도 몰랐던 터라 이 돈을 주머니에 넣고 1주일 동안을 고민했다. 고민하던 끝에 당시 경제기획원에 나가던 H 선배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그랬더니 “응, 촌지 받았구나. 그냥 쓰는 거야” 하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기자들이 술도 잘 먹고 포커판도 잘 벌이는 비밀을 알아챘다. 그리고 나도 열심히 술을 마시고 포커를 배웠다. 솔직히 고백해서 포커판에 앉아 있는 시간과 취재시간이 거의 맞먹을 정도로 미치기도 했다. 직업상의 긴장해소와 킬링 타임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지나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당시는 ‘가께모찌’라 해서 복수의 출입처가 배정되곤 했었다. 워낙 기자수도 적고 점점 뉴스를 커버해야 할 곳은 많아져 한 기자가 두 군데 이상의 출입처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지면은 8면에서 12면 정도여서 마음은 바쁘지만 몸까지 바쁘지는 않았다.
나도 한국은행 외에 전매청을 ‘가께모찌’ 했다. 그러니까 부(副) 출입처가 전매청인 셈이다. 전매청은 1년 가야 담배 값 인상이나 잎담배 수납가 결정 정도가 주요 기사로 등장할 정도이니 한 바퀴 청 내를 돌고 나서는 포커 판에 앉는 게 일과였다.
그날도 그랬다. 포커판에 앉아 한창 끗발이 올라가고 있는데 누가 면회를 왔다고 했다. 나가 보니 당시 부총리였던 장기영 씨의 비서관이었다. 장관이 모시고 오라고 해서 차를 가지고 왔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얼핏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가십기사였다. 사연은 이랬다.
1965년 9월 30일 정부는 금리 현실화를 단행했다. 연율 18%수준의공금리를 일거에 24% 내지 28%까지 올린 파격적 조치였다. 이것을 진두 지휘한 인물은 한은 출신 부총리인 장기영 씨였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장 부총리는 한은 총재를 젖혀놓고 한국은행에서 ‘B미팅’이라는 비공식회의를 1주일에 한번씩 주재했다. 워낙 조치 자체가 충격적이라 후속 대책과 수습이 필요했던 고로 본인이 직접 나선 듯 했다.
이 ‘B미팅’이 약 한달 간 활성화되는 듯 하더니 흐지부지 돼 가고 있다는 소리를 내 뉴스 소스로부터 들었다. 게다가 부총리도 별 관심이 없어졌는지 참석도 안 한다고 했다. 이걸 나는 가십기사로 썼다. ‘한은 B미팅 끽연 간담회장으로 전락’ 제하의 기사는 장 부총리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정책의사 결정에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행원급들만이 회의장에서 담배연기만 뿜어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 부총리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며칠을 두고 집요하게 부총리실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자연 동료 선배들도 이 사실을 알았다. 동양통신의 하진오 기자(현 동원증권 부회장)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가 당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당신 부른 건 부총리로 부른 것이 아니고 기자 선배(한국일보 창업자)로 부른 거야’ 하고 전제를 깔아 놓고는 도표까지 그려가며 기합을 주더라는 것이다. 물론 돌아갈 때는 촌지 봉투 하나를 쥐어 주더라고 했다.
내가 한국은행을 피해 전매청으로 흐르는 빈도가 높아진 것도 그래서였다. 전화로 안되니까 이번에는 비서관을 시켜 공개적으로 납치(?)하려는 기도 같았다. 나는 얼핏 꾀를 내어 쓰던 기사를 마무리하고 10분 내에 오겠다고 하고는 뒷문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 장 부총리는 나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장 부총리는 이렇게 기자들과 크고 작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대표적 관료 중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