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나·의·추·천·작]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그녀를 보기만 해도...>

다섯 여인의 우울한 에피소드 다섯

김소희  2000.11.19 19:44:43

기사프린트

김소희 한겨레21 기자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안정된 가정이 있고, 매력적인 애인이 있는 당신.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의 삶은 꽉 차 있는가.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데뷔작인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사진·98년작)은 일상에서 뭔가 빠진 여자들의 사연이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겹쳐 이어진다.

결코 오지 않는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는 닥터 키너, 유부남인 애인의 아이를 지우는 은행매니저 레베카, 연인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하는 레즈비언 크리스틴, 아들을 더 이상 품안에 둘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동화작가 로즈, 맹인 여동생을 돌보며 데이트 한번 안 하고 사는 형사 캐티.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조연으로 혹은 지나가는 사람으로 잠깐씩 등장한다. 이들의 삶은 별개인 듯하지만 같은 시공간에 착종돼 있다.

영화는 형사 캐티가 옛 친구의 자살을 조사하는 현장에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사연들은 붉은 원피스를 입고 수면제를 먹고 가스를 튼 채 완벽하게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한 보고서인 듯하다. 단단하고 안정돼 보이는 주인공들의 삶에는 자신만의 그늘이 있다. 충족되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실존의 비의, 그리고 미완의 관계들이다. 짧은 행복의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부검의가 집앞에 와서 캐티를 기다리고, 이웃집 난쟁이가 로즈에게 화분을 가져다주고, 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키너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위로 삼아 보여주는 행복은 견고하지도 충실하지도 않다. 그들을 위로하는 남자들은 같은 시간 그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 모른다. 위로는 우연일 뿐이다. 우연은 또 온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았다고 섭섭해할 것도 아니다.

앞이 안 보이는 캐롤은 언니 친구의 죽음을 추리하며 삶의 비밀을 이렇게 귀띔한다. “누가 여자의 인생에 관심이나 있겠어. 그녀는 지쳤을 거야. 오지 않는 전화, 허무한 약속들, 알면서도 걸려 넘어지는 돌들에…” 영화는 삶의 해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견디고 있는 삶을 정면으로 응시할 것을 은밀히 속삭인다.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다정하다.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아버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바치는 성장한 아들의 연서로서도 손색이 없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