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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시·절] 손광식(3) 억압적 분위기 60년대, 술에 얽힌 일화 ´비일비재´

심야 편집국 의자 넘어가고 전화통 깨지기 일쑤, 술판 엎은 후배, 선배들에 물매 맞고 기절하기도

손광식  2000.11.19 20: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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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식 전 경향신문 주필·문화일보 사장





기자사회란 자유분방하고 거친 측면이 있다.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60년대에는 그런 면모가 더욱 두드러졌던 시대였다. 편집국의 전화기와 책상, 걸상이 부서져 나가는 일은 보통이었다. 이런 불상사는 석간 신문의 경우(당시는 석간 신문이 대부분) 주로 밤 시간에 발생했다.

시대적 불만과 기자사회의 관행이라는 것이 얽혀 자연히 술들을 많이 마셨다. 술이 들어가면 평소의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감정지수가 높아지고 그 폭발의 대상을 찾게 된다. 그 대상은 선배가 될 수도 있고 데스크나 국장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서는 억압적인 정권과 사회 분위기일 수도 있었다.

제작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귀가한 심야의 편집국은 그야말로 무인지경. 고함을 쳐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취객의 파괴본능을 자극하기 안성맞춤이다. “이 ××야 !” 한 소리에 데스크의 의자가 넘어가고 선배의 책상에 구두 발자국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래도 성에 안 차면 전화통이 깨져나간다. 물론 야간 당직들이 있지만 말리지도 못하고, 말릴 수도 없다. 차장급의 당직 부장은 부재중이고 진짜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자는 갓 견습이 떨어진 병아리들이라 숙질실로 슬슬 피하는게 상책이다.

날이 밝으면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고개를 숙이고 데스크 앞에서 기합을 받고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징벌이라고 해야 시말서 한 장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감봉 정직 등의 중징계가 있었지만, 당시 기자사회의 불만과 갈등과 관행이라는 것이 상하에 모두 공유되고 있던 터라 형식적인 징계에 그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때로는 이런 ‘폭발행위’가 외부로 확산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출입처가 된다.

지금은 유수한 신문사의 원로가 된 K씨와 경찰기자들이 술을 억병으로 마시고 S파출소를 박살낸 일화가 남아 있다. 후배들 사회에는 이런 ‘사건들’이 폭력행위라기보다는 무슨 훈장처럼 회자되어 객기를 부리다가 오히려 박살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L기자는 견습을 막 끝내고 경찰서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날 따라 송고한 기사도 신문에 안 나고 데스크에게 기합만 받았다. 경찰 캡이 어쩐지 자기를 미워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캡이 우울한 그의 심정을 알았던지 몇몇 기자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마련했다. 으레 그러하듯 술자리는신문제작과데스크에 대한 불만 성토장이 되었다. L기자도 술김에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분위기가 격앙되자 L기자는 가끔 선배들이 하는 식으로 먼저 술상을 엎었다. 술판이 개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L기자는 곧바로 골목으로 끌려 나와 선배들에게 묵사발이 되게 얻어맞았다.

난동이 유책사유가 아니었다. 선배가 할 일을 감히 병아리가 선점한 무례와 계율위반이 응징사유였다. 이 사건을 굳이 기억해 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L기자는 동기 중 톱으로 입사한 인재였고, 폭력이 어찌나 심했던지 그 날 현장에서 물매를 맞고 졸도하기까지 했다. 그 사건의 쇼크와 후유증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얼마 후 언론계를 떠나 버렸다.

어느 겨울철 나는 대선배급에 속하는 Y차장과 숙직을 하게 되었다. 이분은 아예 술과 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별명도 ‘진로’(소주)였다. 나를 불러 옆에 앉히더니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두꺼비’(진로소주)가 대여섯 병이 있었다. 그리고는 마시자고 했다. 핑계를 대고 도망가려 했더니 씩 웃으면서 엄청나게 큰 얼어붙은 소시지 한 개를 서랍에서 꺼냈다.

“임마, 이 좋은 안주를 보고 도망을 칠려고 해”

그 날 몇 병의 소주를 마셨는지는 기억에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게 신문이야” 소리를 수십번이나 들었다는 사실이다. 제작시간에도 ‘두꺼비’만 걸치면 명문을 술술 풀어내곤 했던 Y차장이 왜 그렇게도 술의 힘을 빌렸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알듯도 하다.

숱한 일화가 묻혀 있는 곳이 편집국이다. 그 중에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지금도 기억되는 베스트 급은 ‘생쥐 사건’이다. P부장은 노처녀였다. 어느날 아침 출근을 해 서랍을 열던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여섯 마리의 갓 태어난 생쥐가 오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만삭의 어미 쥐가 몸을 풀 곳을 잘 못 찾은 것이었다. 그 만큼 당시의 편집국이라는 곳은 후지고 비위생적인 면이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는 이 사건이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하루 종일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