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문이 열리고,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석 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고려항공기 넉 대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을 뿐 뜻밖에 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철조망 밖 개울에서 아이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목가적인 느낌. 그게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서 받은 첫 인상이었다. 그리고 이후 8일간의 취재기간 동안 ‘생각보다’는 언제나 북한의 실체를 보기 위해 고민하는 나의 화두가 되었다.
평양은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특히 모란봉 위에서 본 대동강변은 부다페스트보다도 더 그림같았다. 북쪽 사람들을 자극할까봐 원색의 옷, 영어마크 붙은 옷은 죄다 두고 갔는데, 정작 평양 시민이 나이키와 아르마니 진을 입고 있었다. 평양 시민들은 늘 줄을 지어서 어디론가 바쁘게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TV를 보면서 자기 생각을 또렷이 줄줄 쏟아내는 북한 어린이들이 좀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동물원에서 만난 북한 아이들은 생각보다 수줍어서 인터뷰를 할라치면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북한은 변하고 있었다. SBS의 김일성 광장 생방송은 이를테면 조선중앙TV가 광화문 앞에서 생방송을 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충격적 이벤트였다. 적어도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의 개방은 진행돼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곳을 다 가볼 순 없었지만 가뭄 피해 현장과 원조식량 하역현장을 남한 뉴스 카메라 앞에 공개했고 일단 공개하기로 맘먹은 곳에서는 무작위로 북한사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우리에게 다가와 “남조선에서 왔시오?” 하고 먼저 말을 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동강변에서 만난 한 독일인 의사는 지난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이 북한 전역에 대대적으로 게시된 뒤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했다. 풍족한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어도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이젠 좀 살만해졌다는 여유를 찾아볼 수 있었다. 사흘쯤 되자 ‘그렇다면 왜 천문학적인 액수의 원조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의문은 남포를 다녀오면서 바로 풀렸다.
평양은 이름 그대로 특별시였다. 평양인 곳과 평양이 아닌 곳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남포는 북한3대항구의 하나로 우리로 치면 인천이다. 그런데 나아진 모습이 이 정도라면 갈 길이 아직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회는 거대한 교회 같았다. 그들의 하느님을 건들지만 않으면 북한 사람들은 너무도 순박하고 착했다. 우리의 20년 전 시골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내 다시는 오나 봐라’고 다짐할 때도 많았지만, 마지막 밤 술잔 들고 손 붙잡고 노래를 불러보니 역시 그들은 우리와 한 핏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