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습시절(1964년) 내가 받은 첫 급료는 3000원이었다.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 경제적 압박은 없었지만 정말 쥐꼬리만한 월급이었다. 그 때 나는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편이었다.
견습시절은 그 때나 지금이나 발등에 불이 붙는 시절이라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신문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르치던 학생들의 부모들이 3개월만 선생이 더 수고를 해 달라고 간청을 해서 그야말로 낮에도 뛰고 밤에도 뛸 수밖에 없었다. 숙직이 걸린 날은 편집국으로 아이들을 불러 과외판을 벌였다.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다. 그걸 빌미로 견습기자의 ‘몰래 바이트’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이야 아랑곳 없이 나의 백수 친구들은 ‘쥐꼬리’를 타는 날이면 몰려들었다. 아주 ‘한잔 꺾는 날’로 관례화가 되어 버렸다. 월급 봉투와 아르바이트 수입은 금새 바닥이 나고 항시 주머니는 구멍이 났다. 당시의 국회의원 세비는 월 15만원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쥐꼬리’를 받는 날 병아리 기자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국회의원 한 사람이 우리 같은 기자 50명도 거느리겠구나”
견습이 떨어져 제 몫을 하게 되어도 ‘쥐꼬리’는 여전했다. 월 1만원도 채 안된 것으로 기억한다. 저임금 불만은 결국 사태를 일으켰다. 그 때 입사동기는 15명이었는데 ‘집단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선배들도 불만이야 있었겠지만 숫자의 열세 때문인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15명의 ‘병아리들’은 모두 출입처에서 철수, 여관을 전전했다. 회사 쪽에서는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지만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집단퇴사도 불사한다고 강경하게 버텼다. 편집국장이 나서고 이른바 회사의 실세가 나서 타협에 들어갔다. 그 때 나는 협상 대표가 되었다. 스스로 앞장섰다고 하기 보다 밀어 올려진 대표였다.
‘반란부대’는 강약부동이라 회사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여관방 신세가 길어지니 불안하고 기대했던 선배들의 호응도 없자 힘이 빠진 것이다. 회사의 타협안은 ‘적절한 시기’에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반란부대’는 편집국 간부들과 회사에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조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이 사건은 ‘진압’을 당했다. 이심전심이라지만 선배들은 편집국으로 돌아 온 병아리 기자들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말했다.“병신들 한판 벌렸으면 끝장이나 볼 것이지” 그나마 조직의 권위와 위계에 눌려 그 목소리는 크게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신문 경영은 우리 같은 말단기자가 보기에도 엉망이었다. 봉급이 밀리는 날이 많고 회사사업을 할 때는 강요와 압박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워낙 경영합리화보다는 제작 이데올로기(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가 압도하였으므로 적자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적자는 은행 빚을 끌어들이는 편법으로 해결하곤 했다. 은행은 워낙 구린 곳이 많은 터에 권력의 압력이라는 편의적 수단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곳이 언론사들이라 대출 요구를 회피할 수 없었다. 언젠가 H은행 행장은 대출금 회수를 무기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한 언론사에 압박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기자가 동원되고 정치권의 우회적 압력으로 금방 두 손을 들어 버렸다.
어느 정도 봉급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1974년 8월 기자 10년 차인 내 월급은 7만8400원이었다. 이 중 공제액은 소득세 4954원, 주민세 247원, 기자협회비 600원, 국민저축금 1550원, 사우회비 790원으로 총 8141원이다. 따라서 차감 실수령액은 7만259원. 같은 달 지출액을 보면 18만1735원, 배보다 배꼽이 엄청나게 컸다. 당시 집을 장만하느라 은행 빚을 져 이자부담이 있는 데다 집 수리비가 들어가 예외적인 지출이 있긴 했지만 통상 가계부 적자만도 3∼5만원 수준이었다. 그래서 외상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었다. 월급날이면 편집국엔 근처 중국집 주인들이 미리부터 진을 치곤 했는데 이들을 따돌리고 줄행랑을 놓는 해프닝이 자주 연출되었다.
손광식 전 문화일보 사장이 연재해온 ‘그때 그시절’은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손 전 사장은 64년 대한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주필, 문화일보 주필을 역임했으며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집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