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오보’로 꼽히는 미국 대통령 선거 보도를 두고 국내 신문도 초판과 시내판이 엇갈리는 일대 전쟁을 겪었다.
9일 오전 대부분의 신문은 두 후보의 기사를 모두 준비했지만 3시 15분 경 ‘부시 우세’라는 CNN 보도가 있자 본격적인 가판 준비에 들어갔다. 4시 15분 경에는 CNN의 확정보도가 있었고 4시 30분을 전후로 이미 가판 마감이 대부분 끝나 있었다.
‘부시가 아닐수도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은 5시를 넘어서면서 부터. CNN이 5시 35분 경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보도하고 부시 당선 보도를 취소했다. 국제부를 중심으로 긴급 회의에 들어갔지만 대부분 신문사의 윤전기에는 이미 평소보다 30여분 늦게 초판이 걸린 상태였다. 미국 언론의 오보는 고스란히 ‘태평양을 건너‘ 지면에 올랐다.
경향, 국민, 세계, 한국은 초판에서 부시 당선을 확정 보도하고 “관건이 된 플로리다주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선이 확정됐다”고 보도했다. 대한매일, 동아, 중앙, 한겨레는 플로리다주 재검표 사실을 일부 보도했으나 1면 제목과 관련기사는 부시 당선 기사가 그대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평소보다 1시간 여 늦은 8시쯤 초판을 내면서 현재 득표 수와 재검표 소식을 위주로 보도했다. 중앙은 1면에 “이 지면은 부시 당선을 전제로 제작된 것”임을 밝혔고 동아는 1면 톱기사 제목에 큰따옴표를 쓰면서 ‘미 언론 “부시 박빙 승리”’라고 인용보도했다.
그러나 세계는 시내판에서도 ‘부시 당선확실’이라고 보도하는 등의 혼선을 빚었다.
이같은 혼란은 10일까지 이어졌다. 동아와 조선은 각각 초판과 시내판에서 “재개표 결과 오늘 발표”를 보도했다. 같은 날 세계도 “오늘 오전 재검표 결과가 나올 예정이지만 부시 당선에는 영향을 못 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마감시간에 임박해 미국 언론의 오보 파동을 함께 치른 언론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통해 국제 뉴스에 대한 위상 정립과 독자에 대한 공신력을 함께 돌이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 기자는 “공신력있는 현지 언론이 보도하고 고어가 부시에게 축하전화를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서 이번 오보의 불가항력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기자는 “재검표를 오늘 발표한다는 식의 보도는 미국 선거제도를 이해하지 못한 기사”라며 “평소 홀대를 받아온 국제 뉴스의 가치를 다시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자는 미 대선 보도의 비중을 지적했다. “일반 국제 뉴스에 소홀하면서 미 대선 보도만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룰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으며 9일 국내 현안 중 대우 자동차 부도사태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것을 적시했다.
또 가판 시간에 맞춘 최선의 기사였다는 항변에도 비판이 잇따른다. 한 기자는 “미국 언론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가판 역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보다 신중해야 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즈, 더 타임스, 요미우리 등의 언론은 ‘부시 당선’으로 호외제작을 했다가 일제 회수했다.
오보와 관련 경향, 국민, 동아, 대한매일, 한국 등은 10일자에서 정정·사과문을 내고 “미국 언론의 혼란과 마감시간 이후 상황변동에 따른 것이지만 독자에게 혼란을 준 점은 사과한다”고 밝혔다.
주동황 광운대 신방과 교수는 “독자 사과와 초판 시간 지연 보도는 진일보한 조치”라고 평가하면서 “사상 초유의 선거 사고를 미국 언론이 어떻게 수습하고 대처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국내 언론계에 던지는 함의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