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론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 4월이었다. 그해 5월에 개국하는 라디오서울(동양방송의 전신)의 신입사원이 된 것이다. 당시 라디오서울에선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와 성우를 함께 모집했는데 내가 선택한 것은 프로듀서직이었다.
당시 내가 프로듀서직을 선택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여러 언론사의 입사시험에서 기자직을 선택해 번번이 실패의 고배를 들었기 때문에 내겐 기자직이 인연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문학소년의 꿈의 연장선상에서 예술성 있는 드라마를 멋들어지게 만들어보는 기회를 얻으려면 프로듀서가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계산이 맞아떨어졌는지 다행히 나는 라디오서울의 프로듀서 공채 1기로 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아는 이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언론인 생활의 대부분을 신문기자 그것도 논설위원으로 보낸 만큼 당연히 기자, 그것도 신문기자로 출발했으려니 했는데 엉뚱하다는 것이다. 혹 내가 방송기자 생활을 한 것을 아는 이들도 그 점은 의외라는 투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프로듀서로 입사했고 결국 적응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몇 달 동안 드라마 제작에 참여해야 했다. 물론 신출내기 프로듀서는 드라마를 직접 만드는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고 이기하, 김의경, 최상현씨 등 당시 쟁쟁한 드라마 프로듀서의 보조역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활 끝에 ‘프로듀서 부적격’이란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일시 기획실에 배치되었다가 결국 기자직으로 옮기게 됐다.
이렇게 내가 기자가 되는 과정은 이상하게 꼬이고 우연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입사시험 편력을 생각하면 돌고 돌아서 결국 기자직으로 낙착된 그런 일들로 이어졌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운명이 아니라 나의 업이 만들어낸 결과라고나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인문계 출신들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은 아주 제한돼 있었다. 시험을 보아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언론계가 유일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언론사 시험에는 수백 명이 떼로 몰려다녔다. 대학캠퍼스에서 익은 얼굴들을 여기저기 시험장에서 다시 마주치곤 했다. 아무 곳이나 일자리를 얻으면 천행이라는 생각이 지배할 때였다. 시험에 실패할 때마다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실직자의 비애를 더욱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1차 합격의 관문을 뚫은 것은 M방송이었다. 라디오 기자직이었다. 하지만 나는 면접에서 고배를 들어야했다. 중역실 가득히 앉아있던 시험관들이 제가끔 한마디씩 시사적인 문제를 묻는데 마침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자네는 신체검사에서 병종을 받아 군대생활을 못했는데 어디가 나쁜가?” “눈이 고도근시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기자생활도 어렵지 않은가?” “군에는 못갔지만 기자생활이야 못하겠습니까” 이런 대화가 있은 뒤에 결국 나는 불합격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D일보에 1차 합격했다. 국어시험에는 마의상서(麻衣相書)를 한자로 쓰는 문제도 있었고 논문이 아닌 작문 시험엔 ‘전화’라는 제목이 제시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시험은 신체검사와 함께 동대문밖에 있는 아이스링크에 다녀와서 기사작성을 하는 것이 있었다. 현장취재 능력과 기사작성 요령을 알아보자는 의미가 있었던 듯 했지만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쑥스러운 시험이었기 때문에 만족스런 답안을 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면접도 보았다. 사장실인가 하는 곳에서 당시 일석 이희승 사장과 고재욱 선생을 뵈었다. 이 사장은 세상이 다 아는 국어학자이자 인격과 덕망으로 뭉친 깐깐한 선비의 전형이었고 고 선생은 세상이 알아주던 언론인이라 나로서는 존경의 염이 앞서는 분들이었다. 그리고 이 분들은 모두 까마득한 나의 중앙고 선배이시기도 했다. 면접의 자리에서 서류를 들추던 고 선생은 내가 중앙 출신인 것을 보시고 일석 선생에게 “중앙 출신이군요”하고 넌지시 의견을 묻는 눈치였다.
한데 일석 선생은 못들은 체 하시며 고 선생의 다음 말씀을 막고 얼른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고 선생이 후배를 도와주고자 하시던 정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강조하던 중앙의 교풍에 따라 일석 선생이 정에 좌우되지 않고 공정하게 성적을 매기시는 태도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방에선 당시 편집국장이던 천관우 선생이 있었다.
천 선생은 대학원 출신인 나에게 “학자의 길과 기자의 길을 함께 하는 게 어렵지 않겠는가”고 물었는데 나는 “모두 다 할 수도 있다”고 막연히 대답했을 뿐 기백있는 기자의 자질을 보이는 대답을 못했다.
그렇게 고배를 마신 나는라디오서울의 면접에서 행운을 맞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자 시험관 중의 한분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자네 지난번에 M방송 시험도 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분은 “저 친구 거기서도 병역관계로 떨어졌다”고 다른 시험관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분(안수학 상무)의 도움으로 입사시험 편력을 마감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며 그 때문에 입사시험은 얼마간의 행운이 작용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64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에 입사한 이후 중앙일보 논설위원, 동서문제연구소장을 역임했습니다. 88~9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했으며 현재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시니어저널 주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