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칭 사기와 정권의 경직성은 정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학설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럴 법하다. 정권이 권위주의적일수록 “나 어디 있는데”라는 말이 잘 통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런 분위기가 바로 사칭 사기를 가능케 하는 훌륭한 토양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5공화국 때 일이다. 대머리의 60대 노인이 있었다. 이름은 전0환. 이 사람을 전문 사기꾼들이 ‘고용’했다. 무대는 당시 남대문 앞에 있던 서울 시경(현 서울 경찰청) 부근 다방. 그럴 듯한 ‘먹이’를 사냥해 오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전0환 씨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인사하세요. 이분이 바로 전0환 선생님입니다.” 그러면 전0환 씨는 화를 내면서 받는다. “이런 곳에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어떻게 하나.”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겠다. 그를 통한 각종 이권 개입을 조건으로 돈을 뜯어내면 되는 것이다. 하나 절묘한 것은 이들이 이름만 말했을 뿐 그 이상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기단들은 단 한번도 누구의 인척이라거나 공직을 사칭하지 않은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일당 7명이 경찰에 잡혔다. 기억으로 사취액수는 10억원을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법원에서 일부가 무죄로 풀려 나왔다. 전0환이란 진짜 자기 이름을 말했을 뿐, 대통령 인척이라고 사칭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적용할 혐의를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기범들의 법정 진술이 재미있다. 그 이름을 대니 정말 저 분이 그 분이냐고만 확인할 뿐 더 이상은 캐물으려 하지도 않았고 민원 해결 능력도 믿어 의심치 않더란 것이다. 5공 정권의 권위주의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엊그제 청와대 청소원이 한국디지털라인 정현준 사장으로부터 전세금과 유흥비로 1억원, 주식투자 손실보전금 명목으로 8억원 등 모두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정씨가 이 청소원이 뭔가 힘있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 과정이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0여년 전 전 모씨가 사기 대상자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대듯 이 청소원은 자신을 청와대 총무수석실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청소원은 자신을 과장이라고 했을 뿐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끼리는 서로를 과장이라고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야 야단맞을 일이겠지만 법적으로 총무수석실 8급 직원이 스스로를 과장이라고 소개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죄이며 무슨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까. 재판 결과가 기다려진다.
이게 도대체 코미디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청와대에 근무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직도 권세로 비쳐질 정도로 아직은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적’이란 사실이다. 현 정부 출범 초기인 98년 4건이던 청와대 사칭 사기가 올해엔 10건으로 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가장 21세기적이어야 할 벤처를 한다는 3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젊은이가 ‘청와대 총무수석실’이란 말 한마디에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묻지 않고 이런저런 부탁까지 했다니 어처구니없다 못해 절망스럽다. 우린 정말 가망 없는 민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