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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기사 받아쓰랴,뉴스 준비하랴 /내근기자 생활 눈코 뜰새 없어

사건현장에 전차 타고 '유유히' 등장/'기자 자질 없다'평가..내근직 복귀

공종원  2000.12.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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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나의 기자생활은 고달픈 나날이었다. 함께 입사한 친구들이 취재와 기사작성 그리고 녹음기 사용과 편집 프로그램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 있는 상황에서 새로 기자에 입문한 나는 여러모로 뒤질 수밖에 없었다. 신참자인 나는 자연, 내근하면서 기자수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근이라면 직접 기사를 취재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이 없어서 편할 것 같지만 방송보도 분야에서 내근은 보람도 없고 누가 알아주는 이도 없는 고달픈 일의 연속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사무실에 처박혀 지내야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전화를 통해 외근기자들이 불러대는 기사를 아나운서가 읽기 좋은 글씨로 되도록 빨리 백지에 받아 적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선임 기자들은 제대로 빨리 기사를 받아 적지 못한다고 짜증이고 지방 출장지에서 보내는 기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아서 받아 적는 일 자체가 큰 곤욕일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기사가 하루 종일 쉬엄쉬엄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오전 10시 반부터 12시 사이에 폭주하기 때문에 내근기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라디오 뉴스는 정오뉴스가 중심이고 그 앞뒤인 11시 뉴스나 1시 뉴스가 그 다음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인원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되게 일해도 외근 기자들은 내근에 대해 늘 불만이었다. 안에서 전화만 받으면 되니 얼마나 편하냐는 투다.

하지만 내근기자는 이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저녁 6시쯤 외근 기자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8시의 종합뉴스쇼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를 구성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심지어 뉴스진행 프로듀서의 책임도 맡는 것이 항례였고 뉴스논평이나 시사좌담의 프로듀서 노릇도 해야하기 때문에 자연 퇴근도 늦었다. 그리고 인원부족을 감안해 사흘이 멀다고 숙직도 해야했다. 일반적인 숙직은 대개 숙직실에서 잠만 자면 되는 일이지만 방송 보도의 숙직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밤 10시 혹은 11시 뉴스까지 준비해야하고 다음날은 아침 5시 뉴스부터 준비해야 한다. 당시는 오전 5시와 오후 3시 뉴스가 조선일보 뉴스였기 때문에 통행 금지된 광화문 거리를 건너 조선일보까지 가서 기사 초교쇄를 받아와 방송뉴스로 만드는 일도 해야 했다. 그러니 책상 위의 새우잠은 불가피했다.

그런고생 끝에 새로 중앙일보 1기생이 들어오면서 나도 처음 출입처를 갖게됐다. 남대문과 용산경찰서 출입이었다. 이른바 고달픈 경찰기자 생활이었지만 나로선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경찰서 형사실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엄청나게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던 경찰서장도 젊은 기자들을 어려워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사 기자들과 어울려 경찰서 근처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여유도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 기자 초년병 시대에 많은 동료들로부터 큰 도움도 받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출입처에서 만난 한국일보의 강대형, 대한일보의 구종서 형 등의 도움도 받았지만 중학 동창인 오호성 형(현 성균관대 교수)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내겐 스승역할을 했다. 경찰기자들도 대개는 병원의 응급실 정도를 체크하는데 그쳤지만 그는 나를 이끌고 시립병원의 무료병동에서 맨바닥에 누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행려병자들의 모습도 보여주곤 했다.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않지만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였다. 이미 고인이 된 당시의 시경 캡 이대식 선배의 속을 무던히 썩였던 것도 그때였다. “왜 시경에서 파악하기 전에 사건을 취재하지 못하느냐”는 질책이 많았다. 언젠가는 갈월동에서 큰 교통사고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처럼 택시가 많지도 않고 또 용산경찰서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라 전차(당시엔 서울에도 궤도전차가 유유히 다녔다)를 타고 현장에 달려갔다. 벌써 경찰이 깔리고 각사 기자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대강 취재해서 근처 가게의 전화를 빌려 뉴스시간에 맞춰 기사를 불렀지만 이미 시경에서 이 선배가 기사를 부르고 나를 찾더라는 전갈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사건 현장에 전차를 타고 유유히 나타난 괴상한 놈으로 소문나 놀림을 받았다. 나로서는 뉴스시간에 맞춰 결코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기자로선 영점이라는 평가가 자연스레 나오게 됐다. 그런 인상 때문에 나는 외근을 못하고 다시 내근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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