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이 예민한 한 흑인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알렌이었다. 1930년 어느 날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동료 흑인이 백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나무에 목이 매달리는 광경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장면을 보았다는 현실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능함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시를 썼고 노래를 만들었다.
“남쪽에 있는 나무에 이상한 과일이 열렸네/ 잎새에 묻은 피 뿌리에 묻은 피/ 검은 육체가 남풍을 받고 흔들리네”
훗날 빌리 홀리데이가 불러서 유명해진, 재즈사(史)에 남는 명곡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어느 날 밤 나는 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신문사 편집국에 앉아 음악평론가 김진묵 씨가 쓴 <이상한 과일>(현암사 펴냄)이라는 책을 읽는다.
책에 동봉된 CD를 음량을 최대한 작게 한 노트북에 밀어 넣는다. 처연하고 애잔한 목소리의 주인공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이상한 과일’이 흘러나온다.
이 책은 재즈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이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이유는 재즈가 음지식물(陰地植物)이기 때문이다.
재즈는 도대체 희망이란 없었던 흑인 노예들이 악보도 악기도 없이 핏속을 흐르는 고향의 기억과 현실의 고통을 배합해 만들어낸 예술이다.
누구 한 사람이 만들고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삶과 사연들이 모여 음악이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지대한 주장도, 그럴듯한 예측도, 현실에서 써먹을 만한 실전지식도 담겨있지 않다. 그렇다고 재즈에 관한 전문지식을 담은 책도 아니다. 대신 가슴 밑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정신이 있고 음악이 있다.
일상의 속도에 지칠 때가 있다. 무엇이든 능률로 연결되는 현실이 갑갑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재즈’라는 음지식물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느리게 흘러나오는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그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미학이 도리어 우리를 위로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쌓여있는 책 속에서 붉은 색 표지의 <이상한 과일>을 빼어들었고 그날 밤 나는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