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일깨우는 글을 쓰고 싶었다.
세상엔 아직 절망보다 희망이 더 많다는 글을 쓰고 싶었다.
어느 하루쯤
1면 톱으로 제 동생 치료비를 벌려고 짜장면 배달하는 소년가장의 모습을
그려서 사랑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를 일깨우고,
사회면에는 달동네에서 무료 봉사하는 할아버지 의사의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실어
사람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알리고,
경제면에는 시장에서 손수 뜯은 나물을 팔며 정직하게 살면 가난도 행복이라고
말하는 시골 아주머니의 투박한 주장을 담아
삶의 정체를 생각하게 하고,
정치면에는 노숙자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울분을 토닥이는
어느 숨은 정치인의 얘기를
진솔하게 그려내 직분의 본질을 알리고 싶었다.
보험금 때문에 자식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아비의 비정,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나라까지 팔아먹을 높은 이들의 비리,
지나고 나면 허망할 뿐인 허욕 때문에 이웃을 외면하는 가진 자들의 비인간성은 쓰기 싫었다.
비가 가신 다음 더 푸르른 상추 쑥갓 같은 기사로
신문은 더 싱싱해야 하고
기자는 건강하고 당당해야 한다고,
그것이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촌지 얘기, 그것은 저 먼 날의 얘기고
결탁이나 야합은 다 지난 시대의 전설이고
제3의 권력으로 거들먹대는 건 다 남의 얘기라고
믿었다.
그래서 성심 성의를 다했다.
사회면 경제면 정치면에 어둡고 탁한 얘기들이 데드마스크처럼
떠올라도 희망을 가졌었다.
눈에 띄지 않는 1단 짜리 기사에서 사랑도 순애보도 발견하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구석이 더 많은 곳이라고 흐뭇했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기인의 스캔들을 대문짝만하게 싣고,
당적을 바꾼 정치인처럼 충성의 대상이 달라진 내용의 글로 맥칠을 한
신문을
새롭게 태어난 뉴미디어 시대의 신생우량아라도 되는 양 선전하는
낯뜨거운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나 언론인에서 변론인(邊論人)으로 몰려난 지금도
기대를 잃지는 않는다.
신인간, 신지식인이 세상을 새롭게 열
2000년 새 시대를 앞두고
신문은 들끓는 ‘젊은 피’보다 신선한 ‘맑은 피’를 수혈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신문의 인프라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헤아리는
인간의 따뜻한 핏줄을 따라 깔리게 될 것이라는
애틋한기다림으로.
신 효섭
전 문화일보 편집위원
미디어여성연합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