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에 나는 중앙일보 문화부로 옮겨갔다. 당시는 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한 회사였던 때라 출판국에 차출되었다가 곧바로 신문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방송기자만 하다가 신문기자로 적응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도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만 쓰다가 문화면의 긴 글을 쓰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실상 내가 문화부에 발령을 받아 편집국에 들어갔을 당시 손기상 부장을 비롯한 부원들이 상당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방송기자가 과연 신문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가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나와 방송 동기인 이돈형 형이 이미 신문 사회부로 옮겨와 잘 적응하고 있었고, 바로 전까지 학술을 담당하던 김상기(뉴욕대 교수) 선배가 대단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학 철학과 후배인 내가 그 자리를 잘 메울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여러 여건을 생각해 열심히 뛰었다. 또 나 자신, 신문기자라면 문화부 기자가 제일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했다. 그래선지 다행히 나는 문화부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이종석 차장과 장두성 형 그리고 중앙일보 1기인 이영섭 형(이들 세분은 고인이 되었다)이 모두 원만한 이들이라 내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책상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서제숙 차장과 장명수, 윤호미, 김정강 등 여기자들이 모두 격의 없이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도 내겐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일간 종합지들이 지금처럼 30~40면을 발행할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문화면에도 그리 긴 글만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경제여건도 그렇고 신문용지 사정도 여의치 않아 신문들은 4~8면으로 발행하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내용을 압축된 글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문화면의 성격상 톱기사는 내가 담당한 학술, 종교, 출판 혹은 해외문화 같은 기사로 채워야 했기 때문에 늘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계속 취재원을 찾아 대학의 각종 연구소들과 출판부, 그리고 주요 학회와 국역사업단체, 국립중앙도서관과 학자들의 연구실 문을 자주 두드렸다. 중요한 학회 활동이라든가 새로 출판되는 자료 혹은 특이한 논문이 나오면 이를 요약 소개했고 세미나다 심포지엄이다 하는 곳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학회발표는 미리배포되는 페이퍼만 가지고 와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정작 핵심적인 문제와 발표를 둘러싼 토론에서 나오는 생생한 논쟁은 빼놓게 된다. 그래서 좋은 기사를 쓰려면 자연 세미나나 심포지엄이 끝날 때까지 참고 앉아서 발표와 토론을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중요한 학회발표는 토요일 오후에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기자들이 사생활을 희생하며 고리타분한 학회 발표장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정말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취재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사실은 학계에 자극이 되고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제나 지금이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주업무인 학술담당 기자들에게 무슨 대단한 특종이 걸리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좋은 학술기사라고 호평을 듣게 되는 것은 그런 노고를 수반한 경우다. 동아일보의 김병익(문학평론가), 이근무(아주대 교수), 합동통신의 신찬균 기자 등이 그때 함께 고생한 이들이다.
물론 그때 자주 뵈었던 노학자들은 지금 거의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때 이런 저런 일로 알고 지내던 학자들의 근황을 들으면 옛날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는 자연 학자들의 저서 등 많은 책을 모을 수 있었다. 학회의 논문집 같은 자료들은 이사 다니며 끌고 다니다 결국 폐기하고 말게 됐지만 남은 책들만 보아도 옛날이 절로 생각나곤 한다. 얼마전 국학자 이가원 선생의 타계소식을 들으며 잠시 옛날 기억이 솟아났다. 28년 전쯤의 어느날 회사 현관에 손님이 왔다는 전갈에 나가보니 선생이 서 계셨다. 웬일이시냐고 하니까 그는 내 결혼을 뒤늦게 알았다면서 ‘시경’의 관저편에서 한 구절을 뽑아 쓴 휘호를 손수 전해주시는 것이다. 별로 도와드린 일도 없는데 이렇듯 마음 쓰시고 있구나 하며 너무 고마웠던 것이 소중한 추억이다. 또 학자는 아니지만 연대 출판부의 최기준, 동국역경원의 박경훈, 민족문화추진회의 이계황 선생 같은 분은 요즘 만나도 옛정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