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7일 미얀마 야당지도자인 아웅산 수지의 영국인 남편인 마이클 아리스의 죽음을 보도한 국제기사에 초점을 맞췄다.
'애끓는 사부곡'(3월 19일 중앙, 동아) 등 국내 언론은 아리스의 사망 전 이미 그의 암 투병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어 아리스 사망 후 대부분 신문들은 수지와 아리스 부부의 애틋한 사연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일보는 "아리스 당신은 떠나도 조국 미얀마는 못 잊을 겁니다", 중앙일보는 "당신은 내 가슴 속에" , "아내가 자랑스럽다"는 제목 아래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들 부부의 생활과 결혼, 암 투병과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노력 등이 주내용이었다.
여기서 신문들의 숨겨진 시각을 보자.
"아웅산 수지의 글을 모아 책을 내는 등 아내의 싸움을 적극 지원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용기 있고 참을성 많은 남편으로 불렸다" (조선일보 3월 29일자), "91년 노벨 평화상 수상 때에도 조국을 떠나지 못하는 부인 대신 그가 수상식에 참석했고 수백개의 인권상도 부인 대신 받았다. 국제사회는 그를 용기 있고 참을성 많은 남편으로 불렀다"(중앙일보 3월 29일자). 아리스는 항상 '용기있고 참을성 많은 남편'으로 지칭된다.
만약 아웅산 수지가 남편, 아리스가 아내였다면 '참을성 많은 아내'라는 표현이 가능했을까? 남편의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 싸우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전 부수상 부부에 대한 보도에서는 어느 순간에도 "용기 있고 참을성 많은 아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부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이같은 전제조건 하에 대개의 연인이 결혼에 동의하며 또 이같은 동의가 깨졌을 때 부부의 신의도 갈라진다. 아웅산 수지와 마이클 아리스의 민주화투쟁은 어느 한편이 참을성 있게 도와준 결과라기보다 적극적인 동의와 지원의 관계였다. 보도들은 특히 마이클 아리스가 영국의 유명한 티베트 전문가였다는 점을 간과했다. 아리스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티베트에 대해 중국측의 민주화세력을 지원해온 바 있다. 참을성 있는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아리스 그 자신이 티베트 민주화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학자적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 작성 때 쉽게 쓰는 수식어선택에알게 모르게 고정관념이 들어가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 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