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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영국판 가신

안문석  2001.01.04 12: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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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다고 알려진 영국 정치판이 얼마전 불미스런 사건으로 얼룩졌다. 사건의 주인공은 피터 만델슨. 북아일랜드 장관이다. 이 사람이 37만파운드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6억원을 아주 싼 이자로 빌려썼다 해서 말썽이 났다.

20억, 30억원은 코끼리 비스킷으로 여기는 우리 정치판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게다가 통째로 꿀꺽 한 것도 아니고 다만 시중보다 낮은 이자로 빌린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웬만한 선거구는 8백만원 이상을 선거자금으로 못쓰게 돼있는 영국이 아닌가. 그러니 이 정도 사건도 엄청난 부패에 해당한다.

그러면 만델슨은 어떤 사람인가. 우선 토니 블레어 총리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옥스퍼드 대학 동문이기도 하다. 런던 웨크엔드 TV 프로듀서를 했던 만델슨은 이미지 메이킹의 천재다. 97년 총선 당시 노동당의 로고도 바꾸고, 블레어에게는 매스컴 활용 방안을 집중적으로 학습시켜 정권 획득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 바람에 그는 무임소 장관, 통상장관을 거쳐 북아일랜드 장관을 하고 있다.

협상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노동당의 마키아벨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언론 관계는 아직도 이 사람 손에 있다. 언론사 대표도 수시로 만난다. 텔레비전에 나와 노동당 정책 전반을 설명하는 것도 이 사람 몫이다. 이렇게 월권을 밥먹듯 하니 정책의 혼선이 올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이 모습을 통해 우리 정치의 이른바 ‘가신(家臣)’을 본다. 상명하복 관계의 ‘가신’과 만델슨은 좀 다른 양태이긴 하다. ‘측근’ 정도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의 힘을 등에 업고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차이가 없다.

이 만델슨의 머리에는 ‘어떻게 하면 블레어가 인기를 더 얻어 집권을 연장할까’ ‘다음에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이상의 화두는 있어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을 이끄는 ‘동교동’은 과연 아닌가. 아침에 당사로 출근하면서 ‘경제위기의 근원은 뭔가’ ‘구조조정은 어떻게 끌어가야 하나’ ‘남북관계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반대여론을 최소화하면서 지속할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오늘 누구 하고 점심약속이지. 그 자리에서 공조이탈 움직임이 있는 자민련 의원들을 묶어둘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겠군’ ‘이번 당정개편에서는 누구를 무슨 자리에 꼭앉혀야지. 그러려면 최고위원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양반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군’ 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이민가는 사람이 많다. 적성은 던져두고 13과목 모두를 잘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교육제도가 싫고, 경제가 어렵다니까 불안하고, 정치판은 늘 이전투구니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너도 나도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떠난다. 사람을 끌어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진절머리를 치면서 떠나는 사람이 속출하는 나라, 야당 탓만 하는 모습은 너무나 무책임해 보인다.

안문석 KBS 보도제작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