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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공종원  2001.01.04 12: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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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처음 종교담당 기자가 생긴 것은 60년대 후반이다. 이는 물론 그전에는 종교문제가 없었다거나 신문에 종교기사가 전혀 취급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건 기사로 혹은 문화 기사로 혹은 외신으로 종교는 취급되었지만 이른바 종교담당 기자라는 영역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종교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종교기자의 효시는 불교 조계종의 분규를 취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물러가라’고 하는 담화가 나온 것은 50년대의 정치면이지만 그로부터 이른바 불교계의 정화사태로 스님들이 싸움에 휘말리고 사회 문제화하면서 자연 신문 사회부 기자들이 사건취재의 일환으로 종교를 크게 다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구 대처 등 스님들이 무리 지어 다투는 싸움을 연일 기사화 하면서 자연 이런 분규를 몰아 오게된 불교에 대한 심층보도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불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도 알아야 하고 이 땅에 전래하여 근 2000년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전통을 지배해온 불교사상과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수반할 필요가 불가결했다. 한마디로 종교분규는 사회부에서 사건으로만 다루기 어려운 문화적 뿌리가 있다는 것을 언론들이 어렴풋이 이해하면서 신문사 문화부에 종교담당 기자가 생긴 것이다. 신아일보의 방창순, 한국일보의 허영환, 동아일보의 이길범 이용수, 조선일보의 이주혁 이준우, 서울신문의 황석현, 경향신문의 김치강, 김성일, 대한일보의 송선무 정준극 그리고 중앙일보의 고 장두성 기자가 초창기 종교기자의 면면이다. 장 형에 이어 나는 종교담당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뒤를 이어 중앙의 종교담당이 된 이은윤 기자는 90년대에 들어 최초의 종교전문기자가 되었다.

종교 담당이라지만 다른 취재부서와 달리 이른바 출입처가 고정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정한 출입처가 없었던 우리는 점심때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의 아리스 다방에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취재도 했다.

그때 종교기자들이 자주 다니던 곳은 각 종교단체의 본부와 중요 행사장이었다. 그중 가장 자주 다니던 곳은 조계종 총무원과 아카데미 하우스였던 것 같다. 뉴스가 그만큼 많이 나오는 곳이란 점도 있었지만 기자들을 끄는 매력도 없지 않았다. 청담스님이나 경산스님 등불교 조계종의 책임을 맡은 큰스님들은 별로경계하는 빛 없이 기자들을 자주 만나곤 했다. 특별히 몸가짐이나 말씨에 조심하지도 않았다. 스님들도 때로는 약점을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기자들은 대개 그런 스님들의 소탈한 성격 때문에 호감을 가졌다. 내가 신장 결석이 생겨 혜화동의 우석병원(지금은 고대의대 부속병원으로 편입되어 없어짐)에서 진료를 받던 바로 그날 청담스님이 갑자기 열반에 들어 그곳으로 실려왔던 일 때문에 친구들은 ‘죽기도 전에 미리 사리가 나왔다’고 나를 놀려대기도 했다.

강원룡 목사가 주도하던 아카데미하우스의 타궁(친교 섞인 토론회)은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열렸는데 주제가 참신하고 참석자들도 특색이 있어서 기자들의 좋은 취재대상이 됐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에 세종회관 앞에서 전용버스를 타면 그곳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큰 편의인데다가 경제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기자들이 잠시나마 호텔처럼 조촐한 방에서 쉴 수 있었던 점도 큰 매력이었다.

물론 우리는 취재차 해인사나 직지사 같은 큰절에서 스님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지관, 녹원 같은 주지스님이 마련해준 특별한 절 음식에 감읍하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과도 함께 만나 자유롭게 토론도 하고 담소도 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리의 원불교 본부로 정산 대종사를 찾아 뵙기도 하고 심지어는 당시 천도교 교령이던 최덕신 전 외무장관을 만나 천도교의 재건 홍보를 도와달라는 호소를 듣기도 했다. 그 시절의 사건들은 모두 다른 분야 기자들이 경험한 것과는 다른 특별난 경험일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친하던 종교담당 기자들 일부가 30년이 지난 요즘도 한달이 멀다하고 만나 점심을 나누며 정담을 나누곤 하는 것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아주 특별한 인연이라 할 것이다.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