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대륙 진출의 전초 기지로 만들고 30년대 초반에는 만주를 잠식, 세력권 안에 넣는다. 40년대 들어서 미국으로부터 ‘만주국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는데 성공한 일본은 이때부터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30여년이 흐른 1987년 서울… 일본제국은 여전히 건재하고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돼 사람들은 자신이 식민지인이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보다 사회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복거일씨의 첫 작품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쇼우와 62년’은 이렇게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설정으로 시작한다. 때로는 ‘SF’류의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 소설은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라는 기법으로 쓰여졌다.
이 책의 주인공인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게이조우(京城)에 사는 서른아홉살의 평범한 회사원. 자신이 식민지인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2등 국민인 반도인이라는 데만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이 평범한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되고, 서서히 민족을 발견해 나가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간다.
대학에 입학했던 해인 89년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마치 만화책을 보듯이 책장을 넘겼었다. 남겨진 기록과 고증을 원칙으로 삼는 ‘역사’를 상상력으로 뒤집어 보게 되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했던 기억도 있다.
또 소설 속에서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국어상용운동’과 ‘비국어 서적 폐기 운동’으로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따라서 조선인들의 의식조차도 새롭게 개조됐다는 대목에서는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후로 친구들이 볼만한 책을 물으면 나는 이 ‘비명을 찾아서’를 권하곤 했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만큼 재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상황과 소설 속 일본제국의 모습을 교묘히 합성시킨 작가의 솜씨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기노시다 히데요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하다면, 쌀쌀한 퇴근길 서점에 들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