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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75년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발령...파격인사 '충격'

공종원  2000.12.19 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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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나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월간중앙의 차장을 하던 나는 어느날 아침 갑작스럽게 논설위원실로 불려갔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나 자신은 물론 동료들 역시 모두 놀랄 밖에 없었다.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라면 편집국에서 부장, 국장을 거친 노련한 기자출신이거나 글깨나 써서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대학교수라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이 관례인데 40세가 될락말락한 차장급 기자가 논설위원을 한다니 모두 기가 찰 노릇이다.

논설위원실에 가보니 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기자경력이 더 짧아서 각기 경제부와 정치부의 수석이던 2기생인 김영하, 성병욱 기자도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20대에 이미 민족일보 논설위원으로 필명을 날리던 이상두 선생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니 이번 인사는 기자 개인의 입장에서 뿐 아니라 회사차원에서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오죽해야 ‘일요일 밤의 쿠데타’란 말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닌게 아니라 이 인사로 갑자기 논설위원실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황당한 일이라 할 그런 사건이었다. 그냥 저녁 술자리만 가졌을 뿐 정식으로 퇴직통고도 받지 않았다가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서 자신이 그만두게 된 것을 뒤늦게 안 이도 있었다니까 당시 이 인사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가 지금처럼 체제를 잡고 있었던 때도 아니고 노조라는 것이 회사에 있었던 때도 아닌 만큼 논설위원이라도 회사처분에 순응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 같다.

왜 회사가 그런 인사를 했는지 여부는 그때 알 수 없었지만 회사로서도 상당한 검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경륜있고 봉급도 많은 논설위원들을 구태여 대우하며 모시듯 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있었음직 했다. 또 창간 후 짧은 기간에 이미 최고부수 경쟁에 진입한 중앙일보에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판단을 했음직도 하다. 그러자면 신문의 사설도 현장취재 경력을 가진 기자출신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시대 감각에 맞는 젊은 글에 대한 기대도 있음직 했다. 그런 중앙일보의 실험에 대해 도하 신문들도 큰 관심을 가진 것 같았다. 이후 일부 신문에서 젊은 논설위원을 가끔 기용하는 풍조가 생겨난 것도 그 영향인 듯 했다. 또 그때 이후 논설위원을 포함한신문사기자직의정년이 조금씩 낮아졌다.

곁가지로 흐르지만 나는 신문사의 정년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률적으로 나이를 기준으로 일자리를 제한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지식 전문직인 기자의 정년이 일반직 육체 노동자처럼 취급되는 것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보장체제로 연금이 충분하지도 않은데 일자리를 뺏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지금 같이 언론사들이 정년을 일찍 두는 것은 경영측면의 이익만 감안한 것이지 기자나 사회의 이익을 감안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당시 중앙일보 논설진엔 김승한 주필을 위시해 이종복, 홍사중, 이규동 류근일 위원이 있었다. 3공 말기여서 시대상황이 말할 수 없이 좋지 않았던 때라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며 주장을 펼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특히 중앙일보는 삼성과의 관계 때문에 정부를 노골적으로 공격할 수 없는 처지였다. 사람들은 그걸 ‘재벌 신문의 한계’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일단 논설을 써야하는 입장에 있는 우리가 그냥 시대적 여건만 핑계 대면서 적당히 안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직설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대신 우회적으로 논의를 풀거나 은유적으로 정부의 시정을 비판했다. 기사의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하듯 논설 가운데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을 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시민들의 반응이 금방 나타나 호응전화가 오기도 했지만 신문사에 출입하는 기관원들은 용케 그걸 알고는 방에 들러서 “너무 신경을 쓰시면 건강에 좋지 않으십니다”하는 식으로 한마디씩 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여건에서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언론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했다.

근래 와서 쉽게 말하는 이들은 권위주의 시대의 언론이 모두 정권에 아부해서 만세나 불렀지 무엇을 했느냐는 식으로 간단히 매도하고 있지만, 적어도 당시의 언론을 세밀히 검토하면 모두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