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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재외국민 부정 특례입학

우연히 눈에 뜨인 익명 제보에서 시작

이창룡  2001.01.15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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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은 운이라 했던가. 정말 나에겐 그랬다. 기동취재부 생활이 1년여 되다 보니 만사가 시들해져 ‘이젠 부서를 옮겨야 되나’ 싶던 지난해 말 특종은 불현듯 날아들었다.

여느 날처럼 건성건성 제보철을 뒤적이는데 ‘특례 부정’이라는 제목의 제보가 눈에 들어왔다.

“12년 전 과정을 해외에서 이수한 것처럼 졸업장을 위조해 이른바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명문대학에 부정입학한 학생들이 있다”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물론 익명 제보이고. 이런 경우 대개는 자신이 없어 그냥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왠지 ‘잘하면 큰 물건 낚겠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누가 언제 부정입학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데 어떻게 취재를 할 것인가. 일단 제보자를 만나는게 급선무였다. (1주일후 정말 운좋게 제보자와 연락이 됐다. 제보자 보호 차원에서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

제보자로부터 부정 입학자의 소속 대학과 국내 초중교 졸업 사실 등 구체적 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막상 취재에 나서려니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해당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인데 과연 순순히 사실 확인에 응하겠느냐는 의문에서였다. 동료와 상의한 끝에 유감스럽지만 사술(詐術)을 택하기로 하고 대학 쪽부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는 KBS 이창룡 기자인데요. 우리 프로그램 중에 ‘TV는 사랑을 싣고’ 아시죠. 거기 동료 PD가 사람 좀 찾아달라는데 김 아무개 양이라고 지난해 재외국민 특례입학 케이스로 입학했다는군요. 12년 동안 미국에서 초중고 다 나왔다고 하는데, 확인 좀 해줄 수 있죠. 꼭 부탁해요”

10분 후 대학 홍보실에서 그런 학생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김양이 나왔다는 국내 중학교 서무실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실 확인이 이뤄졌다. 처음에 전화로는 확인이 어렵다던 여직원 입에서 끝내 졸업 사실을 확인해주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이제 사실을 확인했으니 카메라 취재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게 더 큰 벽이었다. 사실이 노출될 경우 과연 대학 쪽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입학 서류를 찍게 해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다른 부정입학자의 대학쪽에 또 한번 사기(?)를 쳐서 서류를 찍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 대학의 홍보실 과장은 내가 사건기자로 중부경찰서를 출입할 때 잘 알던 사람이고, 착하기로 소문나 미안한 감이 많이 들었다.

예상대로 이 과장은 아무 의심없이 서류를 찍게해주었다. 가장 어려운 벽을 넘어 기분은 좋았지만, 신뢰를 등치는 것만 같아 갈수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정입학자의 초등학교에는 정식으로 취재 동기를 설명했더니 개인 기록은 노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교감선생님의 입회 하에 쉽게 졸업 서류를 찍게 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예상외로 난취재가 술술 풀려나가면서 부정입학자들의 부모와 브로커인 조건희씨도 만나 사실확인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드디어 지난해 12월 16일 토요일 9시 ‘현장 1234’로 부정입학은 전파를 탔다. 예상대로 전 언론사가 기사를 받는 등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다. 방송 이후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선배 동료들에게서 축하 인사와 전화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번 부정입학 보도와 관련해서 취재에 노출된 가정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전례없이 쓸쓸한 연말연시를 맞이했을 것이다. 불법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 일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도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창룡 KBS 기동취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