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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청부자살

'동반자살' 뒷얘기 찾다 정보 입수

김흥성  2001.01.15 1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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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금요일 오전. 서울 전국부 데스크 지원 근무 1주일의 마지막 날. 강원도에서만 16년째 경찰기자를 맡아 오던 촌놈이 모처럼 서울에 왔다고 친구들이 마련한 송별회 자리에서 얼마나 세게 마셨던지 정신이 몽롱할 때였다.

부장이 “강릉에서 대학생 2명이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 자살한 사건 말인데, 현장에 있던 1명은 도주한 상태로 현재 진행형이라니 뭔가 뒷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평소 필자의 취재 영역이기는 하나 서울에 있는 상태에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고 해서 강릉경찰서 이곳저곳으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양가 없는 얘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한 취재원이 “서울 어느 경찰서에선가 인터넷 자살 사이트 얘기를 한다”는 보석 같은 팩트를 들려줬다.

그 취재원은 필자가 강원도에 있는 줄 알고 서울 얘기를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진 것이지만 그 순간 소름이 끼쳤다. 숙취가 달아날 정도였으니까. 이때부터 ‘모래밭의 금반지 찾기식’ 취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마포경찰서로 알려져 이곳저곳을 확인했지만 좀처럼 핵심에는 접근이 안됐다.

사건 관할인 노원경찰서로 근접해간 것은 거의 점심시간 무렵. 20대 한 직장인이 월계역 근처에서 12일 새벽 피살됐는데 형사들조차 ‘이상한 사건’이라고 알려줬다. 가슴에 딱 한방 찔려 죽기는 했는데 피해자의 반항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피살자가 원한을 살만한 일도 없는 데다 소지품은 모두 있고…. 한마디로 ‘피살된 것은 맞는데 사체의 모습이 영 자살 같다’는 것이다.

과연 경찰은 누구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있는 것일까. 피살자는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자주 접속했고, 용의선상에 오른 주변 인물 중 한명은 강릉에서 동반 자살한 상태였다. 또 이들은 모두 자살 사이트에서 그룹을 형성했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사건의 열쇠는 사체에 있다고 생각됐다. 아울러 범인은 항상 현장에 있다는 수사 형사들의 격언도 떠올랐다. 거기서 급기야 “혹시 죽여달라고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죽여줬을까?”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이 집사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쪽으로 추리가 모아졌다.

수백 구의 변사체를 직접 본 경험이 있고, 수십 차례의 부검 현장에 입회한 필자로선 이미 ‘청부 자살’로 사건을 상정해 놓은 상태였고, 부장을 포함한 경험 많은데스크들도 어렵지 않게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찰 수사도 그 방향으로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쨌든 경향신문은 16일자 가판부터 사회면 톱기사로 경찰이 20대 직장인 피살 사건을 놓고 ‘청부자살 가능성’으로 수사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추리소설에나 나올만한 사건이 국어사전에나 나옴직한 ‘청부자살’이란 어휘를 달고 경향신문을 통해 언론사상 처음으로 지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날 가판이 각 언론사와 경찰·검찰 등 관련기관에 배달된 오후 7시를 전후해 경찰에 잡힌 10대 범인의 말.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났는데 하도 죽여달라고 애원해 100만원을 받고 죽여줬다”고 진술, 살인사건이 청부자살로 밝혀지면서 특종을 확인해주는 순간이었다.

김흥성 경향신문 전국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