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1월 15일자(33호)에 따르면 수사당국은 67년 12월~68년 1월 경제부처를 비롯한 서울의 17개 부처 출입기자단 간사들을 임의연행해 1년간의 보조금, 헌금 내역 등을 수사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동안 공공연히 알려진 치부에 관련된 사건이므로 자체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보도에서 보듯 언론계의 반발은 제한적인 수준이었다.
몇몇 편집국장들은 이 사건이 기자단의 부패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소속 기자들에게 기자단 탈퇴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자협회는 언론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한편 “구속영장도 없이 기자들을 임의연행이라는 형식으로 끌고 가 구타하는 무법적인 행동은 다신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노조 태동기, 탄압과 저항
○…88년은 87년 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태동기를 맞은, 언론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시작됐다.
88년 1월 11일자(489호)는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MBC 노조 등이 회사측의 노조 탈퇴강요, 가입방해 등으로 시련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 4개사 노조는 사측의 조직적인 방해로 30~90명의 조합원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 회사의 부당인사 등이 한동안 계속됐으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2~3월 코리아헤럴드, 마산MBC, 부산일보, 목포·여수·대구MBC, CBS, 경향신문, 연합통신 등 언론노조 설립은 전국적으로 확산을 거듭했다.
이같은 열기는 결국 4월 들어 전국 15개 노조가 참여한 전국언론노조협의회 발족으로 이어졌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전신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