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는 한 남자에게 슬며시 풋풋한 여인이 찾아온다. 사랑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시한부 인생의 사진사는 늦게 찾아온 잿빛사랑을 부여잡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감독 허진호·주연 한석규 심은하)는 사진첩에서 오랜만에 꺼내든 빛 바랜 사진이다. 그 흔한 키스신도 없는 최루성 영화지만 일상에서의 관조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극중 장면에서 주인공이 영문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리모컨 작동방법을 알려주다가 슬픔에 겨워 제풀에 뛰쳐나가는 모습은 두고두고 입맛을 다시게 한다. 지난 98년 개봉 당시 예술적 감성과 상업적 포장이 절묘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가 매겨졌다.
그러나 이 영화를 추천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화의 촬영지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주무대인 초원사진관은 서울의 변방 지역으로 설정됐었지만 실제로는 전북 군산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 가설세트였다.
군산시 신창동 1-5번지. 허준호 감독은 조감독 시절 눈여겨 봐둔 이 곳에서 빛 바랜 사진첩을 완성시켰다.
군산 월명공원을 등에 지고 군산시를 보듬은 ‘달 밝은 동네’인 이 곳은 영화에 비쳐지기 전부터 정겹고 따뜻한 풍광으로 이름 높았다. 바람 한 점조차 궤적을 그릴 것만 같은, 잔뜩 머금은 일상에서의 정적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도 전북을 다녀간 영화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얼핏 살펴봐도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 김유진 감독의 ‘약속’ 등이 있다.
영화 촬영지로 전북을 첫손으로 꼽는 감독들에게 왜 전북을 천착하느냐고 물었다. 한결같이 전북의 따뜻하고 넉넉한 풍광과 훈훈한 인심이 살아있기 때문이란다.
영화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전북 전주에서 국제영화제가 고고성을 터트린 이유를 꼽으라면 ‘이처럼 보이지 않는 영화 인프라도 한몫 했다’는 자의적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