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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공종원<7-끝>

'대통령의 종교' 사설로 엄청난 전화세례

공종원  2001.01.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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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1988년 6월에 나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코리아나호텔 건물 4층에 있던 논설위원실에는 김대중 논설주간을 위시해 이규태 고문, 홍사중, 이도형, 이흥우, 류근일, 김영하, 이남규 위원이 있었다. 사풍이 달라서 조금은 어색한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홍사중, 류근일, 김영하 위원은 이미 중앙일보에서 같이 일하던 이들이고 다른 이들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또 그때가 마침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이라서 우리 사회도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의 제작 여건은 훨씬 좋아지던 때였다. 하지만 대신 격동기이니 만치 신문의 논지와 주장이 점점 중요하게 되던 시기였다. 전에는 모든 것을 권위주의 정권 탓으로 돌리며 안주해도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신문이 자기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독자들의 심판을 받아야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조선일보의 사주는 사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던 것 같다. 위험부담이 있지만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남보다 앞서서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강한 주장을 하는 사설이 장기적으로 독자의 호응을 얻는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런 사설을 쓰기 위해서는 논설진의 자유롭고 개방된 토론이 필수적이다. 전에는 어떤 형태로 운영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조선에서 본 이규태 주필과 김대중 주필 체제하의 조선일보 논설회의는 자주 강한 주장이 난무하는 토론장이 되곤 했다. 드물기는 했지만 때로는 감정이 격해 저 주먹다짐 일보 전까지 갈 정도로 비약하기도 했다. 모두 주장이 강하고 개성과 프라이드마저 강한 사람들이라 쉽게 의견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설의 주제와 논지는 전원일치의 동의를 받아야 결정되곤 했다. 의견이 확실히 갈리는 경우는 더 두고 논의해서 다음에 취급하기로 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논설위원들이 중도보수의 기본노선에는 예외 없이 일치했다.

그런데 93년 봄인가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나는 논설회의에서 대통령의 종교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마침 조선일보가 그의 대통령 당선을 주도했다는 여론이 있던 때였고 또 김영삼 정부에서도 조선과의 밀월을 기대하고 있었던 때였지만 나는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임을 내세우며 청와대에서 매주 목사를 청해 예배를올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위원들 가운데는 김윤곤, 김문순 위원 같은 독실한 개신교인도 있고 류근일 위원 같은 카톨릭인도 있었지만 그것을 사설로 채택하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개인적 입장을 떠나 대통령의 행위는 모두 국가사회의 대승적 차원에서 감시되고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클린턴은 기독교국가라고 할 정도의 그 나라에서도 백악관 밖의 교회에서 매주 예배를 보는데 기독교가 국교적 위치에 있지도 않은 다종교 국가인 이 나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개인적 예배를 보는 것은 국민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썼다. '대통령의 종교'라는 제목의 그 사설로 나는 한동안 엄청난 전화세례를 받아야했다. 정치적 입장과 종교적 입장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편드는 이들이 조선일보가 그럴 수 있는 거냐는 등의 비난을 했고 심지어 조선의 사주 가족이 기독교인인 것을 아느냐고 나를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로부터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의 종교생활을 조심하고 자랑스럽게 공개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물론 종교문제 이외에도 사회, 문화 담당으로 많은 사설을 썼다. 그리고 중앙일보 시대의 분수대를 담당했던데 이어 조선일보에서도 매주 한 두편의 만물상을 집필했다. 사설이나 무기명 칼럼은 회사의 의견이나 주장을 담는 것이라는 점에서 집필자의 존재는 흔히 매몰되곤 한다. 기명칼럼만이 자신의 책임이며 명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누가 쓴지 알 수 없는 사설과 무기명 칼럼들도 집필자의 혼과 애정이 담긴 작품이란 점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 집필자는 역사와 사회에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며, 일단 자기의 양심과 지성을 토대로 책임 있게 글을 썼다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먼 훗날에도 그는 자랑과 보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