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중순께 오전. 이날도 속칭 때거리를 찾기 위해 출입처 여러 부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K씨였다. K씨는 다짜고짜 저녁을 먹자는 것이었다.
K씨는 이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에게 “울주군 온산읍에 사는 한 여자가 손톱 매니큐어를 지우려다 실수로 화장대에 있던 새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이하 주민증)에 아세톤을 떨어뜨렸는데 며칠 뒤 보니 주민등록증 글자가 지워졌다더라”라는 말을 했다.
나는 당시 별다른 생각 없이 얘길 들었지만 다음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새 주민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지난해 9월 울산지역 청소년들 사이에서 주민증 위·변조가 성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실제 고등학생 2명이 주민증을 위·변조하다 경찰에 붙잡힌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여기저기를 수소문한 끝에 일주일만에 찾아낸 그 여자는 그러나 “주민증을 재발급 받으면 되고 별 일 아닌데 언론을 탈 것까지 뭐 있느냐”며 취재에 응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결국 신원을 보호해주고 행정관청 등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설득 끝에 그 여자와 함께 울주군 온산읍사무소를 방문, 본격 취재에 들어갔다.
나는 읍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실험까지 해가며 직접 눈으로 새 플라스틱 주민증의 문제점을 확인해 나갔으며 관계전문가, 발급처인 행정자치부와 조폐공사 등을 상대로 원인규명에 들어갔다. 행자부와 조폐공사 등을 집중 취재하면서 주민증의 결함 사실이 접수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지난해 12월 2일 ‘새주민등록증 위 변조 비상, 아세톤 한 방울에 이름, 주소 등 쉽게 지워졌다’라는 제목으로 첫 보도를 했다.
나는 1보가 나간 후 온산읍장을 비롯, 지역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잘못 발급된 주민증을 이용, 몇 가지 실험을 더 실시했으며 그 결과 아세톤이 떨어진 곳의 주민증 글자와 사진, 지문 등이 여지없이 지워진다는 사실과 지워진 주민증에 새로 지문을 찍는 것은 물론 위·변조된 주민증을 담당공무원에게 보여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연이어 보도했다.
10여일간의 보도 이후 많은 선배 동료들에게서 축하 인사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행자부는 약 500억원에 이르는 국민 혈세를낭비해 놓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예산문제를 이유로 신규 및 재발급자에 한해 새 재질의 주민증을 발급하기로 해 이미 발급된 3600여만장의 주민증은 범죄에 완전히 노출돼 향후 위·변조로 인한 사건이 잇따를 것으로 우려돼 아쉬움을 남긴다.
이 지면을 통해 나를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데스크와 제보해준 K씨, 온산읍장 등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