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중앙청(구 국립중앙박물관) 구내는 조용했다. 거대한 석조건물 뒤편이 근정전(勤政殿)의 담, 추녀 끝과 30여미터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바로 옆에 조선조 제1의 왕궁인 경복궁과 같은 구내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국무총리실을 비롯, 7개 부처와 관련 기관들이 자리잡고 근 2000여명의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인데도 여기가 중앙관서의 센터가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무척 조용했다. 광화문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이 안이 들여다보이는 낮은 돌담이 시작되는 정문에 위병과 수위 2∼3명이 이따금 드나드는 차량을 체크하는 등 한가롭기만 했다.
밖은 세종로 네거리서부터 그런대로 많은 차량들이 오갔으나 중앙청 구내에 들어서면 신기할 정도로 공원처럼 아늑했다. 4년마다의 대통령 취임식, 외국 국빈의 환영식, 각종 국경일 기념식을 거행할 때와 아침, 저녁으로 공무원들이 출퇴근할 때만 북적거렸다. 그토록 적막한(?) 가운데 뉴스를 쫓아다니는 기자들만이 중앙청 복도와 구내를 소리내며 부지런히 다녔다.
8·15 전까지 총독부로 불리웠던 중앙청은 어떤 곳이었나? 일제가 조선을 무력협박으로 강점한 뒤 식민·강압통치를 했던 총본산이자 우리 민족에게는 잊지 못할 원부(怨府)요 치욕의 상징이었다. 물론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 이씨 왕조의 정기, 북악의 정기를 막기 위해 총독부를 경복궁 정문에다 세웠던 만큼 일제의 폭악과 만행에 분노한 대다수 국민들이 치욕의 표상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 뿌리 뽑겠다며 중앙청을 단숨에 해체, 철거했으나 그래도 필자는 예나 이제나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데 변함이 없다.
이곳이 일제가 36년간 한국민을 수탈하고 강제로 징용·징발하여 전장과 사지에 내모는 일을 지휘했던 곳이기는 하나 8·15 이후 그보다 더 긴 세월동안 건국작업을 비롯, 얼마나 많은 역사적인 일들이 있었는가? 중앙청 건물은 우리 겨레에게 치욕의 상징이자 시련과 영광의 역사 현장인 것이다. 때문에 후손들에게 일제의 잔악상과, 비록 국토의 반쪽이나마 독립국을 건설, 발전시켰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우리 현대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거나 상당부분 이전·복원했어야만 했다는 게 필자의 신념이다.
언론과 관련, 8·15 후 중앙청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기자실이있었다. 현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는 총리실 담당 기자실이 있는데 이는 지난날 중앙청 출입 기자실의 후신(後身)인 것이다. 필자는 요즘 일선기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960년대 중앙청 기자실의 취재모습과 각 언론사의 편집국 분위기 등에 관해 쓰기에 앞서 중앙청 기자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총독부 건물은 미점령군사령부가 자리잡아 군정청(軍政廳)으로 불리웠고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중앙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년간의 소위 해방공간 기간 중에는 군정청 기자실에서 미군정청과 군정청의 자문기관인 입법의원(의장 김규식 박사), 그리고 창군 과정 등을 취재했고 건국 후에는 중앙청 출입기자들이 경무대(현 청와대), 국무총리실, 기획처, 총무처, 법제처, 공보처 등을 커버했으며 일부 사는 중앙청 기자들이 국방부를 담당케 했다.
정부수립 직후에는 중앙청에 대통령의 비서실과 직무실이 있어 매주 1∼2회씩 내려와 잠시 머물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이따금씩 기자회견을 했다. 어느날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정 하에 있던 일본에 대해 “독도는 물론 대마도도 한국의 영토다. 그곳의 땅을 파보면 우리 조상들이 썼던 유물들, 각종 비석이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소식에 크게 놀란 당시 요시다시게루 일본 수상은 맥아더 사령관을 찾아가 “아무리 일본이 패전했다지만 이승만 노인이 해도 너무 한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철저한 배일론자(排日論者)인 이 대통령이 일본이 두 번 다시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를 못부리게 하기 위해 대마도 카드를 슬그머니 건드린 노회한 전략이었다. 이에 대해 동경에 있던 정한경 주일대표부 대사가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일본기자들에게 코멘트 했는데 나중에 이를 전해들은 이 대통령은 정 대사를 해임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중앙청에서 전국의 각계 인사들을-학생, 농부, 상인, 지식인들-접견했다. 그러나 면회객들이 “돈을 좀 달라” “취직을 시켜달라” “억울하게 빼앗긴 문중 땅을 찾아달라”는 각종 청탁을 쏟아내자 피곤을 느낀 이 대통령은 접견을 중지했다.
언젠가 지방에서 온 한복에 갓을 쓴 팔순노인 몇몇을 맞아 이 대통령이 손을 내밀자 촌로들은 “나라의 임금님이신데 어떻게 감히 민초들이 악수를 하느냐”며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여 비서진들을 당황케 하기도했다.
비서진들은 접견 케이스 중에서 미담(美談)이 있을 때에는 기자들에게 알려서 가끔 지면을 장식케 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이사는 6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이래 정치부장, 편집국 부국장, 출판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또 기자협회 14대 회장, 관훈클럽 44대 총무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