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언론은 당시 신군부의 탄압과 통제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았다.' 단지 엄혹했던 시절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언론은 원래 그랬다'는 것. 전남대 송정민 교수(언론학)는 15일 '5·18은 끝났는가:5·18민중항쟁과 한국사회의 진로'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밝혔다.
송 교수는 '언론의 5·18 광주항쟁 보도행태와 이념적 함의' 제하 논문에서 81년~97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5월 18일자 또는 19일자 스트레이트 기사의 제목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5·18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규정하는 뉴스 언어는 제목에 있다"는 전제에서 송 교수는 1기 81년~87년(5공 정권기), 2기 88년~92년(6공 정권기), 3기 93년~97년(문민정부기)로 나눠 시기별로 두 신문사의 기사제목을 분석했다.
먼저 5공 시기 제목은 '광주, 천여명 금남로서 시위'(동아 84년), '전국 10개대 시위'(조선 85년), '광주 5·18 산발시위'(동아 86년), '5·18 7주&곳곳서 시위'(조선 87년) 등 28개.
이 시기 제목들은 5·18을 규정하는 범주어로 '시위'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행위의 주체나 대상, 시위나 집회의 요구·주장 등을 나타내주는 언어는 없었다. '5·18=광주=데모'라는 등식만 인식시켰다.
6공 시기는 '광주추모집회 충돌없이 끝나'(동아 89년), '광주 금남로 10만명 집회'(조선 90년), '광주 5·18추모제 10만 운집'(조선 91년), '5·18 잇딴 추모제'(동아 92년) 등 10개 제목으로 보도됐다. 눈에 띄는 것은 5·18을 규정하는 범주어가 시위에서 '추모'로 옮겨갔다는 것. 그러나 '서울선 산발시위 천2백98명', '밤늦게 산발시위' 등 시위가 지속적으로 곁들여짐으로써 추모의 내용이나 시각의 핵심은 여전히 시위에 있음을 드러냈다.
문민정부 시기의 제목은 '광주의 그날 연10만여명 추모행사'(동아 93년), '광주서 5만 추모집회'(조선 94년), '그날을 기억하며&광주 3만여명 5·18희생자 추모'(동아 95년), '5·18 16돌&숙연한 광주'(조선 96년) 등 10개다. 조선일보는 93년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범주어를 썼으나 단 한번에 그쳤다. 이 시기 역시 5·18의 범주어는 '추모'였으며 상대적으로 '시위'라는 범주어의 사용빈도는 줄었다. 5·18영령 정신 계승, 5·18희생자 추모등추모의 내용을 나타내긴 했지만 여전히 추모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 기억이나 시위의 대상과 목표가 무엇인지 적시하는 어휘는 없었다.
송 교수는 이같은 분석을 통해 ▷시위와 추모라는 범주어 속에 5·18의 민주적 주장과 민중적 저항은 배제됐고 ▷5·18 행사의 실제 내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광주=5·18=폭동'의 등식을 깨는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고 요약했다. 또 5·6공 때와 상대적으로 언론활동이 자유로웠던 문민정부에서도 보도내용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사회상황이 언론으로 하여금 5·18 보도를 잘못되게 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음을 반증한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보수언론에 진실보도를 요구할 게 아니라 그들의 보수이념을 자유롭게 표명하도록 만들어 5·18에 대한 왜곡이 그들의 세계관이나 이념에 부합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과격한'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