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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이승만 대통령, 기자들 기습 질문에 노련한 받아치기

이성춘  2001.02.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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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춘 전 한국일보 이사



일부 내각책임제 국가는 몰라도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대통령실 및 정부 중앙청사와 국회의사당은 각각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건국 초기 일정기간 동안 정부와 의사당이 한 건물, 즉 중앙청에 함께 있었던 특이한 기록이 있다. 1948년 5월 10일 초대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5월 30일부터 중앙청을 의사당으로 사용해왔고 그해 8월 15일 출범한 새정부 역시 전술한대로 대통령실, 총리실 그리고 주요 부처가 역시 중앙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당시 서울에 위치나 규모에 있어 중앙청이 가장 편리했고 그곳 외에는 변변한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나 국회가 공존하는데 별로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편리함을 느꼈다. 예를 들어 국회에서 총리나 장관의 출석을 요청하면 연락 받은 대로 3∼5분만에 계단을 내려가 출석했고 이따금 이 대통령이 본회의에 자진 출석하여 정부방침을 설명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하자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정부가 이 지경이니 국회와 국민은 사정을 몰라 우와좌왕했다. 당시 제헌국회의 2년 임기가 끝나자 2대 국회는 50년 5월 30일 총선거 후 6월 20일 첫 집회에서 의장단 선출로 원구성을 마친 상태에서 6·25를 맞은 것이다.

이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 등 관계 장관 등을 불러 여러 차례 구수회의 끝에 27일 자정 비상국무회의를 열었으며 이날 새벽, 이 대통령 내외를 수원으로 피신토록 결정했다. 국회는 26일 상호 11시 중앙청에서 2대 국회 첫 회의이자 비상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 불려나온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우리 국군이 의정부에서 인민군을 제압했고 해주에도 돌입했으며 3일만에 평양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의원들은 일단 안심했다가 포성이 높아지고 피난민이 증가하는 등 상황이 긴박해지자 이날 밤 중앙청에서 비상국회를 열어 ‘수도서울 사수 결의안’을 채택했고 신익희 국회의장, 이충환 위원 등이 27일 새벽 이를 들고 경무대에 올라갔으나 대통령 내외는 기차를 타고 대전 쪽으로 피신한 뒤였다. 결국 대통령과 정부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 의원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가 수십명이 북한군에 의해 피살 또는 강제 납북됐던 것이다.

6월 25일과 26일 낮 북한의 전투기 수대가 서울 상공에 출연, 몇바퀴 돌다가 중앙청과 왕십리, 용산일대에 기총소사를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시 서울은 아늑한 도시여서 L-19 경비행기 한 대만 떠도 곧 눈에 띠었는데 장충동 입구 경동교회 뒤쪽 언덕에 살았던 필자는 기총소사 광경을 보고 어린 나이에도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 큰일 났구나”하며 크게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침략을 계속하던 7월말 어느날 김일성은 참모들과 함께 비밀리에 서울에 도착, 유독 중앙청 건물 안을 둘러보고는 수안보로 내려갔고 하루 머물면서 침략을 독려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귀환했던 이 대통령 내외는 1·4 후퇴 때 정부와 부산으로 갔다가 52년 가을, 서울로 환도했다. 이 대통령은 1년에 2∼3차례 기자회견을 했는데 공보실을 통해 사전에 질문요지를 제출케 했다. 기자단에서 요지를(제목 정도) 내면 경무대측에서 검토한 후 다른 질문은 가급적 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회견이 있는 날 기자들은 경무대에 올라가 회의실에서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했다.

한번은 당시 야당지로 손꼽히던 경향신문의 송균용 기자가 “현재 산업은행이 대출초과로 파산상태에 있는데 각하는 아십니까?”라며 예정에 없던 질문을 했다. 당시 자유당의 실세들이 몇몇 유력 기업인들과 유착, 마구 특혜대출을 해준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분위기는 갑자기 긴장됐고 잠시후 이 대통령은 “여보게 나는 은행원이 아니야. 은행의 잔고가 얼마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대통령이야”라고 답변했다. 노련한 받아치기였다. 그는 이어 “일단 물어봤으니 조사해서 결과를 알아 보라”고 배석한 곽영주 경무관에게 지시했다.

회견이 끝나면 잠시 다과회를 가진 뒤 기자들은 정원에서 대통령 내외와 기념촬영을 했다. 이날 다과회에서 이 대통령은 송 기자에게 다가와 “정치하는 사람들은 욕도 먹는 대신 돈도 먹는 것이야”하며 의미 있는 농담을 했다.

또 언젠가는 조세형 평화신문 기자(현 민주당 고문)가 “자유당의 이용범이라는 사람이 경남도당 위원장이 되려고 마구 돈을 쓰고 있다는데 각하는 알고 계십니까?”라며 역시 예정에 없던 기습질문을 했다. 순간 이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지고 얼굴에 경련이 지나간 뒤 “그런 것이 있다면 조사해 봐야하고 사실로 드러나면 처벌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답변했다.

나중에 기자회견 내용을 전해들은 자유당의 2인자이자 세칭 서대문경무대의 주인인 이기붕국회의장은 “자유당을 고의로 음해하는 것”이라며 노발대발했고 얼마후 조 기자는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떠났다.

이 대통령의 발언과 제스추어는 사뭇 노회했는데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초청으로 방미할 때 공항에 나간 지갑종 세계통신 기자(현 한국전참전협의회 회장)가 대통령의 텁수룩한 머리모습을 보고 “각하 이발 좀 하고 가시지요”라고 하자 그는 “여보게 돈(원조) 얻으러 가는데 말끔하게 차리면 누가 주겠나. 허름하게 보이도록 해야지…”라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