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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사람들 그 이후…]

'열외자'시절 생활고 시달리고 공민권 박탈

김상철 기자  2001.0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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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10·24 이후 이듬해 3월 17일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기자와 PD 113명에 대한 강제해직은 고스란히 동아투위 태동으로 이어졌다. 그때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될 때까지 26년이 흘렀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왔을까. 먼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투위원들의 신분은 ‘열외자’로 남았다.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위원들은 요시찰 인물로 수사기관의 감시대상이 됐으며 취업을 제한 받고 해외여행이 금지되는 등 사실상 공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위원 가운데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구속된 사람은 12명, 구류처분 7명, 중앙정보부 등 수사기관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사람은 80여명에 달했다.

정연주 한겨레 논설고문은 99년 기자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82년 11월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내가 몇 번이나 그런 곳(중앙정보부나 경찰)을 드나들었는지 헤아려보니 크고 작은 것을 죄다 합쳐 12번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고 문제가 절박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75년 9월 17일 동투위원들이 해직된 지 6개월만에 회사 앞에서 자유언론 실천과 복직을 촉구하는 집회를 접어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같은 해 12월 17일 동아투위는 동료들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양복점 외판원 S형-서울시내 안돌아 다니는 곳이 없다. 처음엔 쑥스럽고 말이 안나와 혼이 났지만 이젠 제법 세일즈맨의 틀이 잡혀간다.

광산 십장이 된 J형-석면가루가 든 비닐봉지를 싸 짊어지고 충남 보령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 하기 바쁘다.

한약방 종업원 L형-독문학도가 요즘엔 한약 썰기에 바쁘다. 서툰 솜씨로 작두질을 하다가 새끼손가락이 나갔지만 별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따리 장사 L여사-백화점에 보세품 스웨터를 납품하고 있는데 백화점 상인들의 텃세가 심해 신세타령이 절로 나온단다. 제일 울고 싶은 때는 짐보따리 든 아줌마라고 버스차장이 밀어낼 때. 당해보지 않으면 그 쓰린 맛을 알 수 없단다.”

77년 말 113명의 위원 가운데 농업, 상공업 종사자로 취업 중인 사람은 93명. 실업자들도 20명이나 됐다.

현재 동투위원들은 언론계, 출판계, 학계,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김명걸, 권근술 위원에 이어 최학래 위원이 한겨레 사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이종덕 국제신문 사장도, 연합뉴스와 국민일보 사장을 거친 김종철, 이종대 위원도 동투출신이다.

이밖에 언론계인사로 이계익 디지털타임스 고문, 장윤환 대한매일 논설고문, 정연주 한겨레 논설주간, 성유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등이 있고, 강운구(중앙대), 김민남(동아대), 김진홍(외대), 김학천(건국대), 박지동(광주대), 조학래(서울산업대) 위원 등이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김병익, 김언호 위원은 문학과지성사와 한길사를 운영해왔으며 이부영, 임채정 위원은 정치권에서 활동 중이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위원들도 10명이 됐다. 강정문, 김성균, 김인한, 심재택, 안병섭, 안종필, 이의직, 조민기, 홍선주, 홍종민 위원. 99년 유명을 달리한 고 강정문 위원은 동료들이 “언젠가 우리가 신문사에 복직해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언제 우리가 명예를 잃은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