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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이성춘 이사  2001.0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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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중앙청 건물이 크게 훼손됐다. 북한의 남침 3개월 뒤 유엔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함에 따라 북한군은 중앙청 안팎에 많은 병력과 중화기를 설치했다.

9월 28일 한·미 해병대가 서울탈환 선봉에 나서 서대문 쪽에서 광화문으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완강히 저항하다가 중앙청 건물에 불을 지른 뒤 북악산-북한산 쪽으로 패주했고 드디어 한국해병대원들이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서울을 탈환했다. 이때 북한군이 지른 불로 중앙청은 크게 훼손됐다. 외벽에는 시커먼 그을음이 얼룩졌고 많은 총탄자국이 났다.

폐가가 된 중앙청은 을씨년스러운 인상을 주었지만 나라재정이 빈약해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이런 상태는 5·16 후까지 방치됐다. 따라서 1952년 정부가 환도한 후 중앙청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대신 중앙청 구내 부속건물을 임시중앙청으로 대체, 사용했다. 구내에는 일제 때 지은 부속건물들이 여러 채 있었는데 임시중앙청 건물도 그중 하나였다.

이 건물 1층에는 국무원 사무국(나중 총무처·현 행정자치부의 일부)이, 2층엔 총리실, 국무회의실, 부속실이, 3층에는 공보실이 있었고 기자실은 1층 오른편에 있었다. 요즘 같으면 한 부처의 2개국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당시의 가난한 정부 규모로서는 별로 불편함이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 총리실이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이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위상이 크게 떨어진데다 환도 후에는 총리들이 이 방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박두진 총리는 부산시절부터인 52년 10월∼53년 4월 서리를 거쳐 54년 11월까지 총리를 재임했으나 재무장관을 겸임(51년∼53년 9월)하고 있어 임시중앙청에서 집무한 기간이 길지 않았다. 후임인 변영태 총리는 54년 6월부터 그해 11월까지 재임했지만 51년 4월∼55년 7월 외무장관을 겸직해 외부 쪽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변 총리에 이어 내무장관을 지낸 백한성 씨가 54년 11월∼55년 4월 서리를 역임한 뒤 총리제는 그때부터 60년 민주당 정권이 출범할 때까지 폐지됐고 대신 외무장관이 수석국무위원을 맡았다.

이런 연유로 총리로서 박두진, 백한성씨 등은 거의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고 변 총리가 한달에 1∼2차례 회견을 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겸직하고 있는 외무부 소관이었다. 당시 외무부 청사는 태평로 현 코리아나호텔 건너편 3층 건물이었으나 변 총리는 임시중앙청 총리실에서 회견을 했는데,회견이 있을 때마다 언론계 대선배인 홍종인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 뒤쪽에 앉아 이를 지켜봤다.

이 시절 최대 외교현안은 자주 중단됐던 한일회담, 대일 정책과 일본어부들의 평화선 침범, 우리측의 어선나포와 일본어부들 억류 문제 등이었다. 한번은 변 총리가 회견에서 “무식한 일본어부들이 아무리 경고해도 평화선을 넘어와 조업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해 경계해역에 ‘우끼’(浮漂)를 설치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답변했는데 별안간 “뭐야!”라는 큰 고함소리가 울렸다.

홍 주필은 벌떡 일어서더니 “일국의 재상이 어떻게 공식회견에서 ‘우끼’라는 일본말을 쓰는가. 이래도 되는 거요”하며 준엄하게 질책했다. 크게 당황한 변 총리는 흥분한 홍 주필이 계속 소리 지르며 나무라자 결국 “잘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일본말을 안쓰겠다”고 사과하며 겨우 진정됐다. 회견이 끝난 후 이를 두고 중앙청 기자실은 양론으로 갈라졌다.

“역시 꼬장꼬장한 변 총리를 항복시킨 것은 큰 홍박(洪博)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어 배격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니 존경할만한 애국자다” “홍박 자신이 일제 말 조선인 수탈과 전쟁을 독려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의 사회부장을 지냈음에도 ‘우끼’라는 말 한번 쓴 변 총리는 꾸짖는 것은 모순이다. 선배지만 회견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홍박을 회견장에 못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양론으로 한동안 떠들썩했다.

1950년대 중앙청 기자들의 최대 뉴스거리는 이 대통령의 발언, 그리고 동정이었다. 철저한 반공반일주의자인 이 대통령의 한마디는 큰 뉴스감이 되기 때문에 회견을 하면 약속이나 한 듯 각 신문이 1면 톱이었다. 총리나 장관 회견은 2∼3단 수준 정도였다.

이 대통령은 수시로 민정시찰과 지방순시에 나섰지만 사전에 언론에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어 뒤늦게 확인한 중앙청 기자들은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갔다. 대통령은 지방 나들이에 대부분 기차를 이용했다. 특히 1956년과 60년(3·15 부정선거) 두차례의 정·부통령 선거 때 대규모 군중유세를 한차례도 하지 않는 대신 기차를 타고 전국의 주요도시 역에 잠시 정차, 마중 나온 기관장과 유지들, 주민들에게 역전에서 몇마디 연설을 했다. 미국식 기차유세를 모방한 것이다. 기차유세 때 기자들은 수행원들이 탄 차량에 동승했는데 가끔 기자들 차량에 건너와 “수고들 많다”면서 수행한 공보실장에게 “우리손님들이니 잘 도와주라”고 당부했다.

정부 수립 때 공보처는 50년대 공보실, 60∼70년대 공보부-문화공보부, 80년대 후반 공보처-문화부 그리고 현재 문화관광부, 국정홍보처로 이어져왔는데 50년대 공보실장은 갈홍기, 오재경, 전성천(경향신문 폐간 주도)씨 등이 역임했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