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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사이비`언론`정리`빌미,`정통파에도`철퇴

5·16`이후`최고회의로`모든`권력`이동

이성춘  2001.03.17 12: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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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기자실`썰렁한`시골`간이역`‘전락’



1960년 4·19 학생혁명을 계기로 이 땅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물결이 가득차게 되었다. ‘자유만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구 헌법에는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13조)고 되어 있었으나 1960년 6월 15일 국회에서 통과된 제2공화국 헌법(내각제)은 ‘…자유를 제한받지 않는다’고 하여 유보(留保)조항을 삭제했다. 이에 따라 정기간행물의 발행이 종래의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뀜으로써 언론자유가 만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철철 넘치는 자유의 물결은 각종 부작용을 낳았다. 기본권의 확대는 경찰관들까지 데모하는 ‘데모의 나라’를, 언론자유의 만발은 ‘사이비 언론사와 기자들의 양산’을 몰고왔다.

장면 정권 9개월간 일간신문은 41개에서 500여개, 주간신문은 136개에서 550여개, 14개였던 통신사는 무려 320개로 늘어났다. 너도 나도 정기간행물 등록을 한 뒤 신문은 발행하지 않거나 간간히 발행하면서 신문사·통신사라는 간판 아래 사장·국장·부장·기자증명서를 갖고다니며 청탁, 이권개입, 공갈, 금품갈취 등 갖가지 비행을 저지르는 사례가 급증했다. 그래서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데모대원 아니면 공갈기자 머리에 맞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공갈기자들의 비행은 면단위까지 스며들어 논산 훈련소가 있는 인구 수천명의 연무읍에서는 100여명에 이르는 사이비기자들의 행패를 참다 못한 주민들이 ‘공갈기자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때문에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군사쿠데타지만 실질적 원인으로는 여야의 끊임없는 정쟁, 3000여건의 데모, 그리고 사이비언론의 행패를 드는 견해도 많았고 군부도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앞의 3가지 요인을 한동안 부각시켰다.

권력의 중심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쿠데타를 일으킨지 1주일 뒤인 5월 23일 포고령 11호를 통해 사이비언론사들의 무더기 폐간과 공갈기자들의 구속 등 언론에 철퇴를 가했고 이를 계기로 정통 언론인중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일부 인사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언론계를 떠나게 했다.

사이비언론에 대한 응징은 당시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지만 일부 정통 언론인들에 대한 압력·추방은 훗날 정변때마다 언론을 강제 정비하는 선례가 됐던 것이다.

지난날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와내각제시대의 실세 총리를 취재해온 국내 제1의 중앙청 기자실은 5·16을 계기로 기자들마저 관심을 두지않는 힘 없는 기자실이 되고 말았다. 권력이 무력으로 천하를 장악한 최고회의로 옮겨갔기 때문이다(나중에 설명).

장도영·송요찬·김현철씨 등이 내각수반(국무총리)을 맡았지만 중앙청쪽은 1∼3단의 자잘한 기사들 뿐이고 구 정치인에 대한 정치규제, 개헌, 민정이양 등 굵직한 기사는 최고회의쪽에서 나왔다. 북적이던 중앙청 기자실은 매일 4∼5명의 기자들이 잠시 고개를 내미는 썰렁한 시골 간이역이 된 것이다.

그동안 중앙청은 내부수리를 진행, 관계부처·기관들이 하나씩 입주했고 2년 7개월간의 군정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제3공화국이 시작되면서 행정부의 중심으로서 겨우 면모를 갖췄다. 하지만 권력은 민정이양후 청와대로 이동했기 때문에 중앙청은 대통령의 최고 보좌관인 행정총리가 있는 내각과 행정부처의 센터라는 수준의 위상을 갖춘 것이다.

필자가 ‘나의 일선기자 시절’을 쓰기 앞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묻혀버린 1960년대 초까지의 중앙청 기자실의 부침(浮沈)과 주변 얘기를 길게 한 것은 현재 정부종합청사 안에 있는 ‘총리실 기자실’의 뿌리와 발자취를 소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1963년 한국일보 견습 16기로 입사하여 견습생활과 편집부 등 내근을 거쳐 정치부로 옮긴 뒤 1965년 초가을 첫 출입처로 중앙청에 나갔다. 중앙청 구내에는 국무총리실과 행정실, 기획조정실, 외무·문교·농림·무임소 등 4개 부와 총무·공보·법제 등 3개 처, 그리고 행정개혁조사위원회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외무·문교·농림 등 3개 부처에는 독립된 기자실이 있었고 나머지 기관들은 모두 중앙청 기자실의 담당으로 소위 관할구역이 넓었다.

이때 구내의 부처중 가장 분주하게 돌아간 곳은 외무부. 2년 넘게 끌어온 한·일 기본조약이 양국 외무장관의 조인을 거쳐 어렵게 국회를 통과했으나 중앙청 주변에서는 연일 조약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반일시위가 벌어졌다.

여야는 한·일조약 외에도 월남파병 동의안의 비준여부를 놓고 격돌, 대립하여 국내 정국이 어수선했다. 필자가 중앙청·외무부 취재를 시작할 때의 분위기였다.

<전 한국일보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