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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문건 '자의적 평가.억지해석'일관

김상철 기자  2001.03.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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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안기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밝혀진 ‘한겨레신문 종합분석’ 보고서 내용이 일면적이고 자의적인 평가와 분석으로 일관한 것이라는 지적이 높다. 월간조선을 통해 공개된 문건 전문에 대해 한 언론사 차장은 “일국의 정보기관이라는 곳의 언론관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라고 평했다.

국정원측에서는 여전히 “97년 문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고 유사한 문건도 작성한 바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미 한겨레는 15일 “안기부가 지난 15대 대통령 선거를 8개월 앞두고 ‘한겨레신문사 종합분석’이란 문건을 만들어 광고중단 등 종합적인 언론공작을 추진하려 했음이 밝혀졌다”고 보도했으며 월간조선도 ‘안전기획부 문서’라고 적시했다.





한겨레 직제는 ‘공산주의식 민주집중제’

안기부 문건은 서두에 한겨레의 창간배경을 두고 ‘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표방, 태생적 좌경지’라고 규정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광고주나 소유주, 경영진 등 이해집단의 간섭과 정치권력과의 복합적인 연계는 언론의 독립에 부정적인 평가를 낳는다’는 한국언론2000년위원회의 진단도 ‘태생적 좌경’이 되는 셈이다. ‘정치·경제권력으로부터의 언론독립과 내적 자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편집권 독립’을 위해 정기간행물법 개정안을 입법 청원한 민변, 언론개혁시민연대 입장도 마찬가지다.

문건은 또 ‘편집국을 편집위원회로, 국장을 위원장으로, 부장을 위원으로 명명해 공산주의식 민주집중제를 도입’했다고 해석하는가 하면 ‘편집국 간부 35명 중 80%가 해직·반정부시위 전력자로 체제도전 및 비판 성향’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안기부 문건 작성후 채 4년이 안된 지금 동아투위, 80년 해직언론인들은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을 거쳐 속속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고 있다.

급기야 문건은 ‘안기부에 대한 시각’을 다루면서 자기 논리의 허점을 스스로 드러냈다. ‘일선기자들도 모든 정치활동 배후에 안기부가 있다는 인식으로 작문성 기사를 남발하고 심지어 자사 광고난까지 안기부 탓으로 치부’하고 있다면서 정작 한겨레에 대한 장기대책으로 ‘정부기관 및 대기업 광고중단 유도 등 다각적인 경영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양태 분석에 대해서도 자의적인 해석은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이 문제는 96년말 안기부법, 노동법 날치기 처리 전후 보도를 ‘좌경세력 입지 강화 지원’‘체제비판 여론 조장’이라고 규정한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동법 철폐 보도도 ‘체제저항 자극한다’분석

문건은 안기부법의 위헌성을 지적한 사설과 노동법 철폐운동을 다룬 기사 등을 통해 ‘공안기관에 대한 불신여론 조장, 대공활동 위축을 시도’하고, ‘재벌·정부는 악, 노동자·농민은 선이라는 대결구도를 설정, 체제저항 의식을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97년 1월 한겨레를 비롯한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다른 언론들도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처리로 국민들의 반발을 부른 정부여당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이 때문에 집권기로에 섰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당시 노동법, 안기부법 철회를 촉구하는 학계, 법조계 등 지식인들의 성명이 잇따랐으며 언론계 역시 97년 1월 16일 노동법 철회를 촉구하는 사상 초유의 언론총파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문건은 97년 3월 권오헌 민가협 공동의장의 ‘문제는 다시 양심수다’ 제하 칼럼을 ‘좌경세력 입장강화 지원’의 한 사례로 제시했다. 정부가 3·1절을 맞아 469명을 가석방했으나 석방자 가운데 여전히 양심수가 제외돼있음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의 칼럼은 2월 한국일보에 이미 실린 바 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장인 허베르트 오타와 신부는 이 글에서 “한국에서도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가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현 정부 이후 1000명이 이 법에 의해 체포 구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안기부의 ‘사시’는 한겨레가 97년 1월 16일자에 보도한 700자 분량의 ‘종철아, 민주의 종쳐라’ 제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는 97년 1월 15일 박종철 열사 10주기 추모행사를 전하며 부친 박정기씨의 “종철이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출범한 문민정부가 국민의 기대를 저버려 가슴 아프다. 날치기란 편법을 통해 수사권이 확대된 안기부가 종철이 같은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말을 보도했다.

문건은 이 기사를 ‘현정부를 반민주 독재정부로 규정하면서 반체제운동을 민주화투쟁으로 포장’한 사례로 제시했다.





한겨레 “검증없는 보도 비겁”...월간조선 “사실 전달 주력”

월간조선 보도에 대해서도 문건내용에 대한 검증이나 언론공작 대책에 대한 비판을 도외시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합리적인 판단기준을 갖추고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야할 언론이 해설도 없이 전문만 실은 것은 비겁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월간조선측은 “최대한 사실전달에 주력했고 가치판단은 유보하자는 원칙을 세워 보도했다”는 입장이다. 조갑제 대표이사 겸 편집장은 “문건내용을 여과하거나 평가하면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반론이나 해명이 필요한 부분은 한겨레에 요청하되 평가하지 말고 사실보도로 끝내자는 게 원칙이었다”고 밝혔다. 조 편집장은 문건 입수경위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한겨레는 18일 월간조선에 민형사상 법적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조 편집장은 “한겨레에서 소송을 건다면 한겨레가 지난 10년간 월간조선 명예를 훼손한 보도를 취합,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