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들이 평소 안 입던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출근하는 날이 가끔 있는데 이런 날은 십중팔구 언론중재위에 출석하는 날이다.”
한 시경 캡은 기자실에서 주고받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를 전한다.
언론중재위 창립 첫해 84건에 불과하던 중재 신청 건수는 지난해 607건으로 무려 14배가 늘었다. 이 수치에는 언론 보도에 대응하는 국민 의식의 성숙도가 반영돼 있다.
그러나 언론사 취재 경쟁과 제한된 취재 시간에 쫓기며 ‘알권리’와 ‘프라이버시’의 우선 순위, 혹은 ‘정당한 비판’과 ‘왜곡된 비난’의 경계에서 순간순간 외줄 타기를 하는 기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론과 정정 요구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오는 30일로 창립 20주년을 맞는 언론중재위원회의 박영식 위원장은 “그래도 언제나 사실 보도만을 해달라”며 언론 보도의 첫째 원칙을 다시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아무리 시간을 다투는 기사일지라도 당사자와 연락을 해서 반론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범죄사건 보도에 있어서는 “경찰 수사 기록에 의존해서 피의 사실을 확정 보도하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중재위 20년을 평가해 달라.
“법원에도 조정제도가 있지만 중재 절차만큼 효율적이지 못하다. 매체 수용자의 반론권 개념을 확립하고 취재보도 관행을 개선하면서 중재위가 언론피해 구제 기구로서 정착했다고 본다”
-손해배상 소송의 고액화와 함께 중재신청 건수가 늘고 있는데 이같은 추세를 어떻게 보는가.
“90년대 말부터 언론소송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증가했다. 최근 3년 평균 중재신청은 650여건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국민의 인격권에 대한 인식 성장,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사회적인 대세다. 변화하는 현실을 언론계가 직시하기 바란다.”
-이같은 흐름이 한편으로는 언론사의 취재 활동 위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데.
“설립 당시부터 이런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론사도 중재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96년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재 신청인의 82%, 피신청인의 95%가 중재위의 필요성에 대해 동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자들이 언론 자유와 사생활 보장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취재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원칙적인 얘기지만 사실에 입각한 보도가 제1 원칙이다. 반론권 부여에 인색하지않았으면좋겠다. 반론 확인만 제대로 했어도 중재 신청이 올라오지 않았을 사례가 상당히 많다. 반론보도에 인색하지 않은 것이 언론의 위상을 높이고 수용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길이다.”
-중재위 신청이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보도 사례를 꼽는다면.
“범죄사건 보도에 대한 언론사의 취재 관행을 지적하고 싶다. 검찰의 구속영장이나 경찰의 수사 기록만을 의존하여 피의사실을 확정 보도하는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
-중재 절차 개선과 관련한 계획이 있다면.
“제도적 보완을 통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생각이다. 반론과 정정 보도 신청은 의무적으로 중재위를 거치게 하고 손해배상 소송은 임의적으로 절차를 밟도록 하는 안을 입법 청원할 계획이다. 여러 관련법이 나뉘어 있는 언론피해구제법을 단일법으로 통합하고 언론사 인터넷신문, 온라인 매체, 전광판 신문까지 중재 대상을 넓히는 것도 고려 중이다.” 김 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