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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170일...CBS사람들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지금까지 버텼다"

박미영 기자  2001.03.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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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구병수 기자의 장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몇 달 동안 말기 폐암과 싸우다 눈을 감으셨습니다. 문상을 가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눈을 감으시기 전에 몇 달을 빈둥빈둥 놀고있는 사위에게 ‘파업은 끝났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병수 기자는 큰소리로 ‘파업은 다 끝났습니다. 출근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하더군요. 수척해진 구 조합원의 부인께서 챙겨주시던 국밥은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6개월째 파업을 벌이고 있는 CBS 조합원 가정에 얼마전 한통의 편지와 20㎏짜리 쌀 한포대가 배달됐다. 편지는 민경중 노조위원장이 6개월째 월급 한푼 받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해 나가고 있는 조합원 가정에 위로와 그동안의 소회를 담아 보낸 것이고, 쌀은 사규에 따라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엔지니어 16명이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며 지난달 월급 전액을 노조에 기탁해 마련한 것이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지 6개월째 접어들면서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받아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조합원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집에서 가사만 하던 아내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적금통장을 깨는 일은 이미 기본이 됐다. 보도국 이 모 기자는 최근 11개월을 부어온 2000만원 짜리 적금통장을 깼고, 이미 마이너스 통장이 600만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99년에 산 자동차도 팔아버렸다. 김 모 기자의 부인은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과외를 하기 시작했고, 나 모 기자의 부인은 아예 취직을 했다. 김 모 PD는 일찌감치 아이가 다니던 놀이방을 끊어야 했다. 심지어 최 모 기자는 격일로 장비업체에서 경비를 선다는 소식이다. 이외에도 소문없이 번역일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있고, 기사는 안 쓰지만 언젠가는 다시 나갈 출입처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마포서를 나가던 권 모 기자는 오랜만에 출입처에 들렀다가 그 사이 타사 기자들이 모두 교체돼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는 황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월급 한푼 못받고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업무에 복귀한 이탈자는 10명 남짓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수습직원들과 일부 부장들까지 합세하면서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같이 내부 구성원들이 장기파업사태를 겪으면서도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번에 무너지면 그동안 누적돼온 CBS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할 기회가 영영 없어질 것이라는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언론인금고에 대출 신청을 했다가 사측으로부터 “파업하고 있는 조합원에게는 보증을 서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던 보도국 김 모 기자는 “굶어 죽더라도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정말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금 힘들기는 하지만 6개월을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파업은 CBS가 정치권력에 아부하는 창녀같은 존재로 전락하거나 과다한 부채 때문에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거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한 처절하고 숭고한 몸부림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민 위원장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박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