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치부가 정치, 행정, 통일(북한) 등으로 세분화되었지만 당시는 정치와 행정을 하나로 묶었다. 그즈음 정치부 신병들의 훈련코스는 두가지. 하나는 중앙청 또는 외무부를 거쳐 국회·정당, 그리고 청와대로, 또 하나는 국회와 정당의 3∼4진을 거쳐 중앙청과 외무부로 보냈는데 전자가 비교적 합리적이었다. 처음 행정부쪽에서 관료조직의 구조와 성격, 메카니즘 등은 물론 관료들의 속성을 어느 정도 숙지한 뒤 정당과 국회쪽으로 가면 취재하기가 수월했다. 그것은 중앙청내의 부처 기관들이 많아 1∼2년 정도 출입하면 총리와 장·차관에서부터 주사들까지 거의 얼굴을 익힐 수 있었고 정부에서 제출하는 법률안 등 각종 의안을 파악하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석간기자들은 오전 8시경에 나와 11시경까지 각 방을 돌며 1차 취재를 해 기사를 보낸 후 오후에는 다른 부처들을 돌았고 조간기자들은 신문사에 잠시 들렀다가 9시∼9시30분경에 나와 오전 취재를, 그리고 점심식사후 다시 중요 부서를 돌며 취재를 했다.
중앙청은 세종로쪽에서 보면 4층이나 실제는 5층이다. 하늘에서 보면 직사각형의 건물로 중앙 2∼4층까지 중앙홀이 있고 둘레에 각 방(사무실)들이 있는 형태다. 1층은 중앙청건물 관리소와 경비실, 우체국, 이발관 등이 있고 2층에는 정면에 중앙홀이, 좌측에 법제처가, 우측에는 무임소장관실과 부속실들이 있었고 3층에는 국무총리실 접견실 비서실이, 우측에는 행정실과 기획조정실이, 좌측으로는 총무처가 있었다.
4층에는 우측으로 외무부가, 좌측으로는 문교부가, 5층에는 외무부와 총무처 산하의 각 국·과의 사무실이 있었고 식당은 3층(국무위원용) 2층(3급이하용) 1층(일반직원용)에 있었으며 중앙청 기자실은 2층 동편에 자리잡았다. 이밖에 공보처(1968년 7월 문화공보부로 개편)는 중앙청 서쪽의 부속건물을, 농림부는 5·16전까지 총리실·공보실이 들어있었던 건물을 사용했다.
이처럼 중앙청안 구내에는 여러 부처가 있어 취재차 한바퀴 돌려면 다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게다가 장·차관실에서부터 일반 사무실 등을 순례하고 매일 많은 관리들을 접촉해도 뉴스소득은 시원치 않았다. 그것은 중앙청의 세력이 떨어진데다가 기사도 일반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출입하는 동안깜짝 놀랄만한 특종기사가 나온적이 없고 중앙청 기사가 신문 1면 톱으로 오르는게 고작 1년에 2∼3회 정도였지만 기자들은 1∼2단짜리 단신성 기사와 가십거리를 얻기 위해 발 아프게 돌아다녔다.
중앙청은 국무총리에서부터 주사보 등 2천여명의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이라서 갖가지 ‘쏠쏠한 사건들(?)’과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취재대상은 총리의 정치적·행정적인 움직임, 지방자치가 실시되지 않아 총리행정실이 담당하는 각 부처의 업무통제와 지시, 기획조정실의 국정운영평가, 총무처의 정부기구개편, 공무원의 증감, 소청심사위원회의 공무원의 징벌내용, 법제처의 법률입안및 심사, 공보처의 언론관계사항, 무임소장관실의 대국회·여당과의 업무연락 등이었다.
당시 중앙청내 주요 각료와 기관장들은 민정복귀후 6개월만에 물러난 최두선 내각의 뒤를 이어 정일권 국무총리, 이석제 총무처장관, 홍종철 공보부장관, 김윤기·김원태 무임소장관, 서일교 법제처장, 서정순 행정개혁조사위원장, 김영옥 내각기획조정실장 등이었고 총리비서실장에는 홍성철(전 통일원장관)이었다.
이 시절 중앙청 기자실에는 일간지의 경우 동아(조규하 강인섭) 경향(강증모) 조선(채영석 이준우 주돈식) 대한(신경식 김한수) 중앙(심상기 조남조) 한국(염길정 이성춘) 서울(이한수 이민섭) 신아(박광태 정준모), 통신사의 경우 동양(홍승억 갈천문) 동화(고흥욱) 합동(차지선 조성천), 방송의 경우 DBS(유병무 장순재) TBC(김집 구박) MBC(이영익) 등에서 나왔고 KBS는 공사가 되기전 기자들이 공무원 신분이어서 회원가입이 안되었다. 이밖에 경제 등 특수지와 몇몇 통신기자들이 준회원으로 출입했다.
기자들은 중앙청에 나오면 먼저 총리실에 들른다. 총리실 입구에는 ‘내마음은 호수’를 지은 시인이자 정치평론가로 유명한 고 김동명씨의 따님이 긴머리를 한채 석고처럼 앉아있고 그 뒤쪽 자리에서는 얼마전 아메리칸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30대 미남의 박정수 의전비서관(전 외교통상부장관)이 손님을 맞았다. 텁텁하고 구수한 인상의 홍성철 비서실장의 방에는 정 총리에게 업무보고를 하러온 각부 장관들이 줄을 이어서, 그들을 상대로 이따금 뜻밖의 기사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법제처는 처·차장 등 구성원 거의가 법률전문가들이어서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이따금 각 부처가 비밀리에 성안, 법제처의 심사를위해 제출한 법안들을 낚을 수 있었다. 총리행정실 역시 공만 들이면 기사를 건질 수 있는 낚시터였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폐지된 후 서울시는 총리의 감독·지휘를 받게되어 있어 서울시에서 올린 기구개편, 공무원 숙정방안 등은 그런대로 쓸만한 기사들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중앙청의 두 터주대감은 이석제 총무처·홍종철 공보부장관으로 기자들과 갖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