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5년째를 맞는 신문의 날 표어는 한국 언론의 화두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신문의 날 행사는 57년 ‘신문 주간’ 선포에서 시작됐으며 표어 제정은 59년 3회 행사에서 ‘신문의 날’ 명칭을 채택하면서 시작했다. 기자협회, 신문협회, 편집인협회, 통신협회 등 언론 4단체가 합의해 채택한 초기의 표어는 문장 형식의 슬로건이라기 보다는 그때그때 가장 절실했던 요구를 반영한 ‘주제어’에 가까웠다.
표어 초기의 주제는 악법 철폐. 언론단체는 59년 첫 표어로 ‘언론의 자유’를 내걸고 언론관계 조항이 포함돼 있는 ‘선거법’과 ‘신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주장했다. 이듬해 표어는 아예 ‘악법의 철폐’를 전면으로 내걸고 ‘신문발간 허가제’의 개정을 국회에 요청했다.
신문의 날 표어가 처음으로 표어의 ‘형식’을 갖춘 것은 72년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자’는 표어. ‘알릴 권리’가 군사 정권의 서슬에 위축받던 시절, 기자협회는 당시 이 표어를 채택한 배경에 대해 토론회를 갖고 “알릴 것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신문과 독자는 물론 정부와 국민간에도 괴리가 생긴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같은 의견은 “언론계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권력층과 대화의 길을 트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82년 신문의 날 표어는 ‘품격과 신의를 지키는 신문’. 신문 시장의 과열과 그로 인한 상업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송용식 연합통신 편집국장은 표어 제정에 부쳐 “중앙 4개지가 벌인 제3공화국 연재 파동이나 비화연재물을 둘러싼 과열경쟁현상은 신문 품격과 거리가 동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자는 자정노력 보도는 공정노력’이라는 표어는 93년 당시의 언론계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시 4월 기자협회 설문 조사에서는 기자들 748명 중 46%가 “촌지를 받은 적 있다”고 답했으며 정부가 사이비 기자 단속에 나서는가 하면 언론의 추측 보도가 잇단 사회 문제가 됐다.
표어 제정의 과정에도 언론계 현실이 반영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추진이 밖으로 드러난 69년엔 정치 상황에 대한 각 단체간의 입장이 엇갈려 표어 제정은 물론 행사 자체가 무산됐다. 당시 언론 4단체는 그 해의 표어를 ‘언론의 자주’로 합의했으나 신문협회가 갑자기 ‘언론의 봉사’로 하자는 이견을 제안함에 따라 기자협회 등 3단체만이 표어 채택과기념행사를가졌다. 73년에도 ‘신문의 사명’이라는 표어 채택에 4단체가 합의했으나 신문협회가 갑자기 반대의사를 밝혀 표어 제정 없이 이듬해 표어로 다시 제정되기도 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었던 75년과 박정희 정권이 장기 독재에 들어간 77년에도 신문협회는 ‘제반 사정’을 이유로 신문의 날 행사를 중단했다.
77년 행사 중단 당시 언론인 홍종인씨는 기자협회보 지면에서 “광고문 등으로 신문에서 신문의 날을 뇌까렸지만 (신문의 날 행사 중단은) 언론사 사장들의 역사적 사명감이 얼마나 희박한가를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 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