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해외 여행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그림 속의 떡’이었고 기자들에게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다.
기자가 외국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길은 언론사가 꼭 필요한 취재를 위해 비용을 들여 내보내는 것과 미 국무부의 언론인 연수 초청을 받아 나가는 정도였으나 전자는 언론사들이 가난했던 때라 기회란 가뭄에 콩나기 정도였고 후자 역시 많은 사람들이 노리는 터여서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처럼 어려웠던 것이다.
나라도, 사회도 가난하고 음울하던 때여서 ‘해외여행’이란 말만 들어도 부러움으로 가슴이 설레일 정도였다. 때문에 취재가 한가할 때면 기자실에서는 단 5∼7일간 홍콩이나 도쿄를 다녀 온 외유 경험자들이 동료들을 상대로 마치 1년 이상 머물다 온 것처럼 현지의 풍물과 사정에 관해 온갖 살을 붙여 고장난 레코드판 돌아가듯 수십 차례나 되풀이해 브리핑을 했고 기자들은 허풍과 과장투성이인 줄 알면서도 열심히 듣곤 했다.
각사 기자들이 이따금씩 한·일 회담이나 동남아 사태 취재를 위해 외국에 다녀오면서 드러난 실수와 무용담(?)들이 하나 둘 씩 전해졌다.
이때는 KAL의 전신인 KNA시절로서 기내에서 맨발로 다니기, 마시던 물 통로에 버리기, 빵 대신 밥으로 달라며 승무원에게 빵 던지기, 식사 도중 포크로 머리나 등 긁기, 술 한 병을 다 마신 후 취해서 술 더 가져오라고 소리지르며 노래부르기, 화장실 안에 비치된 치약·치솔·면도기에다 휴지까지 몽땅 쓸어담기 등등 지금 같으면 3류 여행객들의 1급 추태들이지만 낭만적인 애교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실제 KNA측에서 언론사에 항의한 적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어쨌거나 건국 이래 기자단이 고위급 인사의 해외 공식방문을 집단적으로 수행 취재한 것은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 때가 효시였다. 이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1965년 5월 16일), 동남아 순방(1966년 2월 7일), 월남 참전국정상회담(동년 10월 21일, 마닐라) 참석 등으로 차츰 뿌리를 내렸다.
이즈음 중앙청 기자실에는 경사(?)가 있었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국무총리의 외국방문이 이뤄진 것. 정일권 국무총리가 말레이지아 등을 방문하기 위해 1965년 9월 25일 출국했는데 동아, 조선, 한국 등 5명의 출입기자가 취재를 위해 수행한 것이다.
이 시절 기자가 해외취재에 나갈 경우 언론사마다 어김없이 내리는 훈령이 있었다.사건·사고 등 경천동지 할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외국서 본사에 전화하지 말 것, 가급적 전화나 전보로 기사를 송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자들은 공식 방문 또는 회의 참석의 의의에 관한 해설과 스트레이트 기사를 출발 전에 써놓는다. 이것 뿐인가. 방문과 회의의 결산·해설까지 써놓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간해설까지 써놓고가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때도 있었다. 통신요금까지 아끼고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언론사들의 재정상태는 매우 빈약했던 것이다.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 F신문사가 사정에 의해 계약제로 운영하던 워싱턴특파원 Q씨에게 해약을 통보하자 느닷없는 일방통고에 화가 난 Q씨는 두툼한 자료를 들고 전화국에 가서 수신자부담으로 송부케 했다. 난데없는 정체불명의 자료홍수에 놀란 F사는 미국 통신국에 송고 중단을 요청했으나 “일단 신청을 받으면 신청인의 동의 없이는 중단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았고 고민 끝에 결국 텔렉스의 코드를 아예 뽑아버렸다. Q씨가 기습적으로 골탕을 먹였던 것이다.
5인의 기자들은 중앙청기자단의 부러움에 찬 전송을 받으며 정일권 총리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3일간의 말레이지아 방문 일정이 끝나는 날 Y사의 S기자는 본사로부터 “다른 수행기자들은 연일 각종 기사를 보내는데 귀하는 언제까지 잠만 잘 것인가. 당장 그곳 사정에 관한 기사를 보내라”는 전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동행한 기자 4명도 연일 빠듯한 일정대로 함께 행동했는데 언제 무슨 기사를 보냈단 말인가. 물어보니 출국전에 백과사전 등 각종 자료를 보고 ‘한국와 말레이지아 양국의 협력 증진’이란 방문의의 해설, ‘한층 더 강화된 우호관계 발전’이란 중간해설, 그밖에 말레이지아와 다음 방문국의 문화·풍물·시내모습 등의 스케치 등 3∼4가지의 기사를 작성해 놓은 것을 게재한 것 아닌가?
S기자는 그순간부터 가는 곳마다 일정을 외면하고 호텔방에서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기사만드는 작업에 매달렸다. 해설·스트레이트·스케치 등을 갑자기 쓰는 것도 힘들지만 전보로 보내려면 일일이 Romanize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리는 고역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기사부실을 만회하려 여러 꼭지를 계속 보냈다.
그런데 귀국 이틀전 S기자는 본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받고는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Don’t send such dull stories or resign from company(엉터리 기사들의 송고를 즉각 중지하던지 사표를 내던지 택일하라).”
신문사로서는 이미 때도 늦고 내용도 엉성한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전보요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최후통첩을 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