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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켜며] 좋은 신문

김 현 기자  2001.04.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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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시 제정을 두고 ‘좋은 신문’ 논란이 한창이다.

‘신문고시=언론탄압’을 주장하는 동아·조선·중앙 3사는 신문 구독의 선택권을 독자에게 맡기자고 말한다. 무가지를 아무리 많이 뿌려도 결국 ‘좋은 신문’이 독자의 선택을 받는다며 이를 ‘신문고시 무용론’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무가지 배포를 규제하는 신문고시가 독자 수준을 얕보는 발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자가 가장 많이 선택하는’, 그래서 부수가 많은 자신들이 ‘좋은 신문’이 아니냐는 자신감이 강하게 묻어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진흙탕 싸움’을 거듭해온 신문시장의 물량경쟁을 돌아보면 이들 세 신문의 주장은 아전인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97년 신문고시가 처음 제정된 건 경기도 원당 지역에서 ‘살인극’을 부른 조선-중앙의 부수 확장 경쟁 때문이었다. 지면의 질적인 변화를 통해 독자의 선택을 받기 보다는 경품, 무가지 등으로 독자를 유인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 이들 신문이었다. 오히려 그 와중에서 지면의 질은 더욱 악화됐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무한 증면 경쟁속에서 지면은 늘어났지만 인원충원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든 판촉비의 절반만 기자 채용이나 재교육에 투자했다면 진짜 ‘좋은 신문’이 되지 않았을까.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 좋은 프로그램이 아닌 것처럼 부수가 많은 신문이 반드시 좋은 신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면에선 깊이 있는 분석이나 논평을 하는 신문은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없기 때문에 독자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권위지와 대중지로 경계가 뚜렷이 나눠지는 유럽 신문의 경우가 좋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