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말문을 연 김에 1960년대의 해외 나들이에 관해 조금 상세히 얘기 하겠다. 이 시절 해외 나들이는 기자들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꿈같은 얘기나 다름 없었다.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외교관이나 대기업체 주재원 및 수출관계요원, 국제회의 참석과 연수관계 공무원, 기술·인력 유학생, 연수 교수 등에 국한됐다. 해외관광이란 것 자체가 없었고 언론사 특파원도 회사 형편에 따라 한 두 곳에만 보내거나 현지거주 한국인을 통신원(stringer) 형태로 쓰는 정도였다. 수출이 쥐꼬리만한 수준으로 외화수입이 턱없이 빈약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여성, 어린이, 노약자 등 불요불급(不要不急)한 대상에 대해서는 여권을 발행하지 말라고 일찌감치 외무부에 엄명을 내린 터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여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1950년대 말부터 단계적으로 여행 자유화를 실시한 일본은 1960년대 이케다(池田)내각이 시도한 경기 부양책에 의한 특수경기를 바탕으로 세계 각지로 여행객을 상징하는 깃발 부대가 나갔고 서울에도 심상치 않게 깃발부대가 출현했다.
언론인들의 해외 나들이는 앞서 소개한 대로 신문사의 용단(?)에 의한 해외출장 초청 케이스로 미 국무성과 영국정부의 초청이 있었으나 중견 및 간부급이 주 대상이었고 나중에는 대만정부의 신문국(우리의 국정홍보처)이 항공료를 제외한 숙박 등 체류비를 전담하는 조건(항공료는 본인 부담)으로 대만정부 홍보를 위한 프로그램이 추가됐다. 이밖에 유학을 위한 국가유학자격시험과 풀브라이트·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 장학금시험이 있었다.
모처럼 해외출장의 기회를 얻었얼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음날부터 여권발급준비, 출국 수속이라는 고행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먼저 중앙정보부가 주관하고 치안국이 담당하는 신원조회가 시작돼 연좌제나 학생시절 이상한 전력이 있을 경우 경계경보가 발동되고 나들이는 중지된다. 신원조회가 완료되면 병무청을 찾아 병적 확인서를 받아야 하는데 징병기피, 탈영 등이 있을 경우 자동적으로 기각된다. 다음으로 15가지에 가까운 서류준비를 끝내면 여권을 발급받게 되는데 여권 수령 후에는 해외에서 북한요원들을 만났을때의 처신·대처요령 등의 안보교육을 받게된다.
안보교육이 끝나면 방문국에 비자신청을 낸다. 당시는 자유항인 홍콩이 3일 정도 허용하는 것을제외하고는 비자(사증)면제 협정이 없어 입국사증을 받아야 했는데 이것이 5∼20일 정도가 소요돼 이래저래 애를 먹었다. 이때쯤 필자는 동료들에게 연일 출국턱을 내는 바람에 몸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목적지인 동경 홍콩 및 동남아 각국에 지친 몸을 끌고 가서도 취재와 송고라는 본업 외에 마지막으로 해야할 업무가 있었다. 그것은 관행이 되어버린 선물 준비. 소속부원들, 국장단, 입사 동기들, 주변 선·후배들에게 줄 것으로 적게는 20여개부터 보통 40∼50개에 이르며 종류도 볼펜, 만년필, 넥타이, 장갑 등 가지가지다.
비용도 적지 않지만 좀더 싸고 실속있는 것을 찾아다니다 보면 파김치가 되어 “내가 왜 왔던가”하는 탄식이 나온다. 여기에다 현지 특산 술까지 연일 마셔야 하니 귀국 비행기에 오를 때 쯤이면 기진맥진이다. 이렇게 해서 선물을 돌리고 부원 등에게 귀국턱을 내고나면 완전히 빈털털이 신세에 머리는 멍해져 엊그제 다녀온 “동경, 홍콩, 방콕, 타이페이 시가지 모습이 어땠더라”라며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오락가락이다.
그래서 기자들의 첫 해외 나들이는 고개와 허리와 다리만 아픈 예행연습이고 적어도 3번째쯤은 되어야 그곳 도시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얘기들이 돌았다. 그런데 일부사의 파렴치한 몇몇 선배들은 피곤하기만한 소장기자들의 나들이를 악용, 실리를 취해 후배들의 빈축을 샀다. 즉 출반전에 ‘우리 집사람 결혼기념 선물’ ‘집사람은 외제 화장품만 쓰기 때문에…’ ‘평생 소원이 이런 타이프라이터를 갖는 것’이라며 간곡히 부탁, 한나절동안 시내를 헤매며 어렵게 사다준 화장품, 타이프라이터 등을 2∼3배 가격으로 밀매해 이득을 취하려다 들통이 난 것이다.
해외 나들이의 암적 존재였던 선물 돌리기가 각 사의 자정분위기에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비록 주마간산식이지만 각국의 모습, 풍물, 정세 등을 조금이라도 더 살피고 익혀야 할 귀중한 시간에 불펜조각을 고르러 다닌다는 것은 실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아무 것도 사오지 말라. 그럴 돈 있으면 열심히 현지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시장의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마시며 그곳 분위기를 접하고 오라’고 권유하곤 했다.
아무튼 꽉 막혔던 해외 나들이는 1964년 동경올림픽때 재일동포들이 부모 형제 등 3천여명을 초청하면서부터열리기 시작했다. 이어 1960년대 중반 이후 월남전에 전투병력이 파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건설근로자와 연예인들이 해외로 나가게 됐고, 언론사들도 특파원들을 계속 내보내면서 서서히 활성화돼 국민들의 시야도 점차 넓어지게 됐다.